노란 유채꽃과 하얀 이팝나무. 연한 생명의 시작이 산천에 가득한 요즘, 저는 매년 새로운 꽃가루에 잠식되어 가던 여사님의 편지를 떠올렸습니다.
서재방에서 상자를 꺼내 오랜만에 물수건으로 구석구석 씻깁니다. 물기 머금어 더 환해진 상자가 잠시 파란 하늘을 반사하다 점점 말라갑니다.
예쁘게 마른 과거를 열어봅니다. 마음이 물든 편지봉투와, 타인의 생일을 반기는 빨간 꽃수의 축전들... 따스한 봉투들의 둔덕아래, 여사님의 엽서들이 차분히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엽서를 깨우려니 약간 긴장되어 저도 오랜만에 긴 호흡을 시작합니다.
이팝나무가 만개하던 제 삶의 봄날에, 코스모스에서 저를 연상했다며 그해 가을 처음으로 엽서를 보내주셨지요. 평소여사님 모습과 목소리, 목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정갈한 필체로 따지자면 여사님 쪽이 코스모스와 더 비슷할 터인데 저는 가벼운 마음만 닮아 엽서에도 하늘하늘 몸을 흔들었답니다. 그날의 글이 좋아 저는 몇십 번의 가을이 지나서도 조용히 바람 따라 몸을 흔들곤 합니다.
저는 글씨가 썩 곱지는 않아, 여사님의 엽서만큼 제 답장이 예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자 한 자 채워져 가는 저의 촘촘한 걸음에 거짓된 마음은 단 한 발자국도 없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엽서로더많이주고받은 우리의 인연조차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라는 도구로 이어진 당신의 정한 마음을, 저는 어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뻐하며, 기다렸습니다.여사님의 차분한 음성이 전화선을 타고 닿을 때면, 저는 가을 같은 당신의 차분함에 오히려 생기를 얻었으니까요.
여사님처럼 저도 누군가의 봄을 피워내 본 적이 있었을까요. 저의 가벼움으로는 누군가의 양분이 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나, 저는 저만의 방법으로 어떤 이의 따뜻한 계절이 되고자 합니다. 재빠른 자전거에게 가을을 알려주는 연연한 코스모스 한 송이라도 되어...
저보다 먼저 계절을 겪고 계신 언제나 근사하던 여사님께, 다시금 산뜻한 제 마음을 전합니다. 오늘날도 항상 햇살 좋던 과거만 같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