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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Oct 03. 2024

고모님 전 상서

보편을 위한 비범에게 바칩니다




 돌려받지 않으면 억울함이 남을 것 같은 세상에서, 받은 것만 기억하고 준 것은 일체 기억 못 할 수도 있을까요? 인간에게 받은 것 하나 없지만 숲향이 묻은 선선함을 안겨주는 가을바람은 당신을 닮았습니다. 당신의 소담스러운 창가 화분에, 제철을 맞아 작성한 저의 전언이 닿길 바랍니다.     


 언제라도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모습을 만나 뵐 수 있지만, 고모를 회상하면 왜인지 흑백 사진 속 모습으로 우선 떠오릅니다. 하얀 두건을 쓰고 고향집 툇마루를 닦다 말고,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든 누군가를 향해 환히 웃고 계신 모습. 사진은 빛바랬는데 젊고 아름다운 모습은 제 마음속에서 가시지가 않습니다. 툇마루를 데우던 햇살은 고모의 싱그러운 미소를 밝게 비추고, 그 미소 옆에는 꼬물거리는 아기 하나가 있습니다. 티 없어 보이는 그 웃음은, 툇마루를 기어 다니다 마루 아래로 떨어질세라 아기 몸에 붙은 고모의 손과 공존합니다.      


 당시 미혼이었던 고모는, 낮에 일하느라 바쁜 엄마 대신 저희 남매 모두에게 신의 손과 등을 내어주었습니다. 고모의 넉넉한 웃음과 야무진 손 아래서 오 남매는 마음 부유하게 자랐습니다. 첫 돌이 된 막내조카를 몰래 축하하기 위해 고모는 당신의 용돈을 털어 모으고, 그러고도 부족한 돈을 마련키 위해 마당에 널어둔 할머니의 잔디씨를 둘러메고, 읍내까지 통통한 아기를 업고 걸었습니다. 돌이 지나고도 한동안 입었던 사각거리는 분홍 드레스와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흑백의 돌사진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사수하기 위한 고모의 당연하지 않은 노력이었습니다.      


 집에 서책이 별로 없던 저의 면학을 고려하여 고모 댁에서 서책을 편히 빌려 읽게 하신 것도, 고모 집 뒷산 언덕을 함께 올라 들어간 작은 교회에서 함께 두 손 모은 것도 기억합니다. 예배 끝나갈 즈음, 목사님이 고모의 이름을 호명하셨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한다며 감사 헌금을 올렸다는 목사님의 말씀에서 저는 잠시 고모에게 종교 같은 사랑을 느꼈어요. 언덕 위 작은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고모와 언덕을 내려오던 그 아이는 지금까지 그 후광을 받으며 보호받았습니다.    

 

 저희 남매에게 언제나 방패가 되어주신 고모를 얼마 전 자매들과 조우하였지요. 함께 점심을 먹은 후, 고모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해준 것도 없는 나를 기억하고 고마워하는 조카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명절 오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조카들에게 옷 한 벌씩 사주고 싶은 게 내 소원이니 꼭 들어달라'고...


 당신이 우리에게 해준 것을 우리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초라할까요. 께 받은 것이 너무 많다고 거절을 하다, 오래전 저를 위한 헌금처럼 고모가 조카들에게 갑주를 사주고 싶은 거란 걸 깨닫고서 우리는 추석빔을 한 벌씩 받았습니다. 다 사 입히고서야 흐뭇하게 웃으시던 고모...

돌복 드레스를 입고 꼬까꼬까 옹알거리던 그때도, 중년의 나이에 명절 앞두고 고모가 사준 옷을 들고 즐거워하던 지금도, 고모는 가난했던 우리가 평범하고 특별한 경험들을 할 수 있게끔 언제나 당연하지 않은 노력들을 해오셨습니다.


 저를 키울 당시 고모의 나이를 한참 지난 저인데도, 환한 웃음과 어른스러움이 공존하는 고모의 모습을  차마 닮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사랑과 웃음이 많은 고모 등에 힌 채 낮잠을 자던 린 제 숨결은 유덕한 당신의 마음 덕에 그래도 한 뼘의 햇살 같은 따스함을 얻었나 봅니다.     


난 업어준 거 말곤 해준 게 없는데 왜 날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준 것은 잊고서 내어주시기만 하는 당신은 인간보단 종교나 자연을 닮았습니다. 감사의 제 마음이 고모의 창가 화분에 바람으로 닿아 오래도록 고모와 함께 정정하게 빛나기를 바라봅니다.

              








추신.  학창 시절 버스를 타고 고모집을 스칠 때, 언덕의 작은 예배당에서 퍼지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 가슴에 은은한 파문과 이어지는 평안을 처음으로 인도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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