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기차역에 걸렸던 거대한 시간이 드넓은 창틀에 태양처럼 걸렸다. 무음의 초침 소리 사이로 또각또각 걸을 때마다 시계의 태엽을 뒤로 되감을 수 있었다. 태엽은 저 거대한 시계가 기차의 이정표로 쓰이던 그 시절을 향해 증기기관 마냥 달려가다, 한 작품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구름처럼 작품의 태엽이 흘러가야 했을 터인데 저 작품은 나의 내연기관을 멈추게 했다. 그러고선 군중을 뒤로한 채 홀로 기차에서 내린 나는, 나무에 절인 초록빛이 신선하게 흘러내리던 그날의 강가를 향해 환승한 쪽배는 조금씩 물길을 가르고 나아갔다.
“외할머니, 우리 소풍 가요."
여름의 햇살이 줄줄 녹아 흐르는 어느 주말, 여름 나무처럼 푸르른 조카가 오래도록 그늘을 맡은 외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부모님은 외출할 때만 입는 하얀 모시를 입고서 조카의 손을 꼬옥 잡았다.
차 타고 십여분을 가니, 시원함을 지키느라 태양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다리가 이글이글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낯선 다리 아래서 개울물 소리가 동네처럼 흐르고 있었다. "아 시원해." 흡족한 목소리와 함께 발들이 그새 몇 개 늘어났다.
큰언니가 손수 준비한 정성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졌다 금새 비어지고, 수박에 부딪히며 반짝이는 물가엔 수국마냥 생기 가득한 큰 조카 얼굴이 비친다. 젊은 날의 엄마가 길러준, 꽃처럼 젊던 우리가 당신을 닮은 청춘을 다시금 떨구어냈다. 멀리서 외조부모님을 한 번 더 뵈려 찾아든 조카의 얼굴을 얻었으니, 빈 그릇에 담긴 한때들이 전혀 아깝지 않다.
얕은 물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처럼 시간을 졸졸 보낸다. 시냇물에는 사진 찍는 세 자매도,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버지도, 함께 사진을 찍는 우리도 흘러간다. 자식들과 사진 찍는다고 더 환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빛나는 아버지 모습이 그늘아래 찰칵 번쩍인다. 번쩍이는 플래시처럼, 바다를 향해 가는 시냇물처럼 이 완벽한 소풍에도 끝이 온다는 걸 아버지도 우리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의 생은 시냇물을 닮아, 잔잔하지만 따스하기만 했다. 끝없이 태양을 마주한 우리 아래, 우리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른 시간에 만난 우리는, 시냇물처럼 끝없이 흘러가면 언젠가는 바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돗자리처럼 팽팽하게 마음을 다잡아 펼친다. 그러고서 오늘이 그리울 거란 말을 하며 서로를 찍는다. 개울물에 흐르는 찰나의 햇살보다는 흥성스러운 우리들을, 풀잎에 아른거리는 음영보다는 잔잔한 물살로 서리처럼 하얗게 웃는 아버지의 미소를.
튜브물감이 발명되고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들처럼, 집밥만 먹일 수 없다는 큰언니의 마음은 여름이면 아이스박스를 가득 채웠다. 화가는 흐르는 풀잎에 아른거리는 음영조차 밝게 물들이는 흥성스러운 사람들을 남겼고, 우리의 소풍은 카메라 앞에서는 유달리 환하게 웃으시던 아버지의 웃음을 남겼다. 아버지와 화가는 시곗바늘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그 시계의 흐름에서 작별을 만나더라도 장면 속에서만은 영원하리라 믿은 것 같았다.
르누아르가 다시 오르세로 나를 돌려보내주고 얼마 안 있어 난 회랑을 빠져나왔다. 시계는 붉어져 객들과 서서히 침묵에 잠기고 있었다. 자신의 평판과 상관없이 평생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아름다움을 그리던 르누아르는 한 이방인 일가의 소풍을 환기시켰다. 그해 여름을 만드는 건 푸르른 나무와, 뜨거운 태양과 태양에 마모되어 가는 다리만이 아니었다. 나무 그늘의 곁에서 힘차게 웃으며, 작별이란 말을 애써 숨긴 채 서로를 남기던 서로가 그 주체였다.
어떤 풍경 아래서도 아름다운 인간의 찰나를 행복으로 남겨주던 르누아르의 알록달록한 팔레트가, 미술관을 빠져나오는 일행들의 볼에도 작은 홍조를 상기시키며 미술관의 소등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