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군화 아래에 눈이 떨어졌다. 야간 보초를 서는 장병 앞에서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조차 쉬이 짓이겨지곤 했다. 경계근무를 서는 신참은 처마 밖 눈송이를 비켜두어 번 발을 털고는 초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겹겹의 추위와 고요로 에워싼 산하에도 밤은 찾아들어 최전방까지 밀려온 바람이 깃발을 맹렬히 흔들었다. 총을 고쳐 잡을 때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한 줄의 계급과 ‘진대완’이란 자수가 휘청거렸다. 오늘따라 유독 강하게 펄럭이는 깃발 소리에 대완은 무언가에 쫓기느라 펄떡이는 심장을 떠올렸다. 그러다 휘이, 갑작스레 눈보라가 멎었다.
대완은 어둠 속에서 급격히 고요로 물든 차디찬 산자락을 응시했다. 나란히 서서 밤을 지키던 선임이 말없이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선임의 입에서 눈처럼 하얀 입김이 끝없이 뿜어져 나왔다.
“자, 진대완. 비밀로 해라.”
대완이한 개비를건네받자 선임이 라이터에 불을 댕겨주었다. 대완은 차디찬 밤공기와 담배연기를 섞기 시작했다. 하얀 눈 위에서 피어오르는 두 개의 구름 위로 익숙한 허연 장면들이 폐부에 스며들었다.
급작스러웠던 입영 통지서와, 지금쯤 종강을 맞아 흥성스레 튀어 오를 막걸리 사발과, 서클 친구들과 입곤 했던 하얀 한복. 입대 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사 입힌 돕바*를입고이젠 안 춥다며 웃던 막내 동생의 하얀 얼굴과 하얀 겨울에도 점점 그을러 가는 아버지와 어머니.촌에 경사라도나는가보다가마솥이지레신나서고아낸허연고기 덩어리와 아버지가 따고 흘러내리는 맥주 거품. 그리고 어느 날부터 악몽처럼 따라붙던 새하얀 손전등...
대완의 고향은 지천에꽃이피는 산골. 자잘한 사과꽃이 연연함을 떨구던 과수원에서 엄마가 만들어준 책보자기를 둘러메고 신나게 뛰어서, 마침내 눈보라 치는 어느 최전방에 도래했다. 어느 순간부터 대완의 숨은 가빠져왔을까. 기나긴 밤에 피는 연초의 연기가 유달리 길게 뻗어 투명한 밤을 희뿌옇게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