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소녀는 당시 국민학교 겨울방학을 맞아 도심에 위치한 친척집에 놀러 갔습니다. 나무 계단이 있는 이층 양옥집에는 일찌감치 신세를 지며 몇 년째 유학 중인 큰오빠도 있었습니다. 유학을 나와 대학에서 수학하고 있다는 큰오빠와는 재회할 때마다 반가우면서도 낯설었습니다. 막내와 장남 사이에는 십 년이란 긴 터울이 있었고, 터울을 메울 수 있을 만큼 타지생활을 하는 오빠와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막내에게 큰오빠는 언제나 침묵을 두른 산이었습니다. 말은 없지만 공허하지 않은 여백이 있었고, 올려다보면 늘 자리에 맞게 든든한 사람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하늬바람 부는 도시에서, 서로를 객으로 만난 국민학교의 고학년 소녀와 새내기 티를 갓 벗은 대학생 청년. 청년은 막내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다음날이 되어 막내 동생을 버스에 태우고 도시 중심가로 안내했습니다.
그곳은 사시사철 푸르름을 병풍으로 친 고향과 달리, 알록달록한 전구가 반짝이는 상점들이 가득했습니다. 전구 아래에 삭막한 회색빛을 인지하기에 막내는 너무 순수했기에, 연말연시를 맞아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달콤한 전등빛에, 시골에선 도통 만날 수가 없는 산타할아버지를 금방이라도 조우할 것 같다는 마음으로 그저 두근거렸습니다. 큰 산 같던 오빠를 굽이굽이 따라나선 길마다 캐럴은 빙글빙글 퍼지며, 소녀의 시간은 한참 동안 오르골처럼 태엽을 감았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음반 위를 정신없이 걷다 보니 백화점 건물이 남매를 눈앞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고층의 거대한 석조 건물은 한순간에 남매를 삼켰습니다. 회전문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온 백화점 내부엔 쉬지 않고 움직이는 뼈대처럼 생긴 검은 계단이 있었고, 움직이는 뼈대는 남매를 아동복 코너에다 올려다 주었습니다.
“우와 이쁘다 오빠야...”
언니들의 옷을 물려 입기만 하다가 새 옷들을 보니 막내는 신기하기만 합니다. 청년은 친절하게 막내의 말에 답했습니다.
“그래. 제일 마음에 드는 외투 함 골라봐라. 오빠가 사줄게.”
소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오빠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곤 찬찬히 옷을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녀의 눈에 마네킹이 입고 있는 외투가 보였습니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가져본 경험이 별로 없는 소녀는 말없이 마네킹만 쳐다보았습니다. 청년은 점원을 불러 물었습니다.
“저 옷... 얘가 입을 만한 사이즈 있습니까?”
점원은 소녀를 한 번 쳐다보았습니다.
“손님, 이 옷이 인기가 많아서 마네킹이 입고 있는 게 마지막이에요. 이거라도 한 번 입어보시겠어요?”
청년의 수긍에 점원은 마네킹에게서 외투를 벗겨 소녀에게 주었습니다. 회갈색의 코트가 폭닥폭닥한 촉감을 주었습니다. 소녀가 외투를 입자 점원은 단추를 잠가주었습니다.
“사이즈는 살짝 넉넉한데, 그래도 한창 클 때니까요.”
품에 맞는 옷을 사주고 싶은 마음에 청년은 소녀를 쳐다보았습니다. 소녀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른 옷을 볼까 아니면 이 옷으로 할래?”
옷이 너무 마음에 들었던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청년은 해진 옷 안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봉투를 꺼냈습니다. 자신의 옷처럼 꼬깃한 지폐를 점원에게 건네자, 점원은 소녀가 입고 왔던 옷을 종이가방에 넣어주었습니다. 한겨울이라기엔 너무 얇은 소재의 웃옷이 종이 가방에 쏙 들어갔습니다. 소녀는 한참 동안 새 돕바를 입고서 거울에 비친 모습을 요리조리 살폈습니다. 한참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며 좋아하는 기색이 들킬세라 어색한 표정을 짓는 동생을 보며 오빠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오빠는 종이가방 안에 든 얇은 웃옷 대신 막내를 애써 쳐다보며 백화점을 나옵니다. 소녀는 그해 방학이 끝나고도, 옷이 품에 안 맞을 때까지 그 옷을 오래도록 즐겨 입었습니다.
청년의 봉투는 그날 백화점을 나오니 부쩍 얇아졌습니다. 부모님께 학비 이상 매번 손을 벌릴 수 없으니 밥값이라도 보태려고 막노동으로 벌었던 돈이었습니다. 막내가 겨우내 꺼내 입던 옷이 큰오빠의 비싼 땀방울이었음을 철이 없던 막내는 상당히 늦게서야 깨달았습니다. 오빠는 그 흔한 생색도 없이 과묵한 사람이었던지라, 오빠를 알아주는 데 그만큼 시간이 더 오래 걸렸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큰오빠와 같이 늙어가는 나이가 된 막내 동생은 드디어 오빠의 긴 침묵들이 궁금해졌습니다. 물려받은 얇은 외투를 입은 어린 동생을 보고 나서의 침묵은 무엇이었는지, 외투를 사주고 나서 형편은 어떠했을지. 멀리서 올려다본 숲은 늘 말이 없었지만, 그 숲을 오가던 비바람과 햇살은 궁극적으로 안녕하기 이전에 어떤 풍파가 있었던 건지...
숲에서 불어온 바람과 햇살을 맞으며, 막내인 저는 큰오빠가 사준 외투를 입고 하이얀 대지 위에 다시 섰습니다. 얇은 옷가지들을 덧입고 추위에 견디는 동생에게 아까울 것 없이 사준 돕바를 다시 들고서, 단 한 번도 나보다 어린 순간이 없던 큰오빠를 거슬러 찾았습니다.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10대 중후반의 푸릇한 큰오빠를 진대완이란 이름으로 쉬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현실에선 늘 고요한 숲 같던 오빠였는데, 글에서 만난 대완은 내가 잘 몰랐던 사회적인 맥락을 안고서 슬퍼하는 여리고 섬세한 청년이었습니다. 오빠를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하나씩 알아갈수록, 이야기는 점차 오래전 가족에게 전해 들을 때와 다른 빛깔을 띄었습니다. 매번 허름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이소룡의 쿵후를 연마하던 오빠는 기억하지만, 육체수련을 끝내고 찬 바닥에 홀로 앉아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짓눌려 가만히 버티는 대완은 집필을 하면서야 만났습니다. 장남과 인문계열의 대학생. 두 역할 사이의 미덕과 갈등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대완은 고독을 발판 삼아 타인의 아픔을 들어온 누구보다 빛나고 푸르른 숲이었습니다.
홀로 고요해 보이던 숲에는 시대의 비바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펄럭이는 바람 소리를 온몸으로 맞던 포장마차 속의 청년 대완에게, 재산을 털어 사주었던 나의 돕바를 돌려주고자 합니다. 나의 겨울이 한동안 따스할 수 있게 해 주어 고맙습니다. 가정을 이루기 전 한없이 고독했을 오빠의 시린 영혼을 당신이 건넨 돕바로 방한(防寒)할 수 있길. 과거의 오빠에게 직접 갈 수는 없으니, 현재를 사는 중년의 당신이 ‘농악의 인디언들’을 통해 당대를 살던 당신의 등에 작은 외투를 덮어주길.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허연 것들을 모두 걷어내고 보니 아쉬움만 남지만, 극적인 삶을 살아온 오빠의 삶을 씨줄 삼아 무사히 글을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홀로 푸르게 견뎌온 한 청년이자 제 큰 오빠인 진대완에게 이 글을 헌정합니다.
고맙습니다.
막냇동생 지구 사는 까만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