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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농악의 족속들

마지막화

by 지구 사는 까만별



소장님은 공연장 뒷마당에 마련된 한적하게 널찍한 자리를 손으로 권했다. 마주보고 앉자 소장님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아이고 기자님 반갑습니데이. 오늘은 제가 휴가라가 꼴이 쪼매 낫지예? 평소는 마 흙구디 라예.”

겸손한 소장님의 말과는 달리 명함에는 인간문화재라는 직함이 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네 소장님. 반가이 맞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ㅇㅇ은행 소속 ㅇㅇ신문사 진대완 기잡니다.” 대완이 허리를 깍듯하게 굽히며 때가 타지 않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소장은 대완의 명함을 들여다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사실 진 기자님이 전화 주시가꼬 기뻤습니데이. 솔직히 말해가, 들놀이에 기세 좋은 바람이 쌔리 준 적은 별시로 없었다 아입니까. 옛날에는 나라에서 못하게 했꼬, 지금은 나라에선 해도 된다 카는데도 사람들 관심이 팍 줄어뿟다 아입니까. 참말로 바람 잘 날 읎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자님 전화가 온 라예. 전화도 주시고, 서울서 이래 귀한 걸음도 해주시이까네 이제 빌로 섭섭한 것도 읎심더 허허.” 인간문화재의 호쾌한 웃음은 흙먼지에 희끗해진 한복과 달리 총천연색으로 빛이 났다. 소장님은 자신이 준비한 둥굴레차를 대완이 다 마신 것을 보자 말을 했다.

“기자님, 고마 취재하러 가보입시더.”


앞마당에선 무대 직전 준비가 한창이었다. 대완에게도 익숙한 악기의 음률에 몸이 정겹게 흔들렸다. 오래전의 흥이 솟는 것을 참으며, 대완은 다시금 수첩과 사진기를 꺼냈다. 무형과 유형의 얼들이 꿈틀거리며 척박하디 척박한 대지를 다지던 정월 대보름날. 들놀이는 서민의 한을 품은 초성을 내며 바람처럼 세상에 발을 디뎠다. 춤과 노래가 공존한다면 양반에 대한 풍자조차도 웃음으로 잠시 무마될 수 있던 곳. 대완은 넉넉한 보름달 아래서 민중들의 억눌린 마음이 쏟아져 나오던 들의 한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찰칵찰칵... 깊은 멋이 배어있는 가장 한국적인 춤사위 속에 잡아먹힌 양 춤을 추는 감정은 대완도 잘 알고 있었다. 회색지대에서 금기 짙은 검은 땅으로 바뀐 순간까지도 대완은 언젠가 기자가 되면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짙푸른 젊음, 외로움, 땀, 아픔이 서린 족속을 인디언이란 잘못된 정의로 이름 짓는 한, 세상에 인디언이 멸종될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껏 대완 대신 눈물과 땀을 흘려줄 수 있게 도와준 수영야류가 오래도록 계승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대완은 한동안 공연에 집중했다.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소장님은 악수를 건네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연신 거듭하였다. 소장님과 헤어지니 늦은 시각이었다. 대완은 급히 기차역으로 이동했고, 매표소에서 30분 뒤에 막차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대완은 기차표를 끊고서 대합실에 앉아 담배를 꺼냈다. 창가에 앉아있던 터라 불씨가 대완 옆에서 하나 더 번쩍했다. 숨을 들이켜 담배에 불을 붙인 대완은 앉은 채 등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야경 속에서 거대한 혈류들이 빛을 내며 방방곡곡을 이동하고 있었다. 도시로 유학을 떠나야 했던 당시 시골 청소년의 시기에서, 문명은 무섭도록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담배연기가 도시의 정경을 몽환적으로 묘사하며, 대완의 기도로 퍼져가는 걸 느낄 때 즈음 대완은 이윽고 창문에 얼깃설깃 스치는 실루엣을 발견했다. 하얀 와이셔츠와 감청빛 넥타이를 매고서 자신과 눈을 마주친 남자는 영락없는 사회인이었다. 그의 눈은 안온한 호흡을 품고서 더 이상 독기와 고독을 이글거리지 않았다. 대완은 자신의 오랜 꿈과 현실에서 깜빡였다. 분노가 사라진 것은 평안일 수도 있고, 타협일지도 모른다. 고요해진 감정이 비현실적이라 대완은 담배를 다시금 물었다. 연기가 폐부로 들어오는 걸 보니 꿈은 아니었다.


“아... 진짜 꿈이 이루어졌네. 내가 생각한 대로 다 이뤄지다니...”

대완은 생생한 꿈이 현실이 된 현재의 모습에 전율이 일었다. 세상에다 정의를 부르짖던 자신의 초성은 자신의 가슴과 세상 어딘가에 깊은 우물처럼 고요히 잠재돼 있으리라. 언제든 일그러진 것들에 아파하는 물결들이 침묵 아래에서 일렁였다. 대완의 의식 속에서 농민을 위한 신문사를 차리겠다는 포장마차의 전등은 감히 꺼트려지지 않았다. 안정 속에서야 대완은 자신이 지킬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대완은 재떨이에 담뱃불을 꺼뜨리고 벽돌 만한 시커먼 휴대폰을 꺼냈다. 잠시후 수화기에서 오르골 소리가 들리더니, 곧장 동물 소리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여보세요?” 익숙한 여인의 또렷한 음성이 들렸다. 야심한 시각까지 자신의 연락을 기다린 그녀가 대완은 내심 고마웠다.

응 여보. 내다. 이제 취재 마치고 곧 올라간다. 여태까지 안 잤나?”

대완의 걱정에 선희는 가볍게 웃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울타리에서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는 오통통한 아기 볼에다 전화기를 갖다 댔다. 동물들 소리가 급히 멎고, 분유 내음이 풍기는 호흡 만이 두 전화기에서 공유되었다. 신혼부부는 잠시나마 아기 숨소리를 소롯이 귀에 품었다.

끊임없이 새근거리며 숨을 내뿜는 아기에게 대완은 놀랄세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민주야, 이따 만나자.”





P.S

지금까지 ‘농악의 인디언들’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다음 화에 헌정사와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https://youtu.be/--mZLgAKlvU?si=n3VQZygmmP14_n6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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