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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정환 Nov 17. 2023

호박꽃이 아름답다고 말했다가

 효과적으로 의사전달하는 법

                    소신껏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게 옳은 일인지, 상대가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게 옳은 일인지 궁금할 때가 많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곤란한 말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가령 입 냄새가 나는 친구에게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것,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옳은 말하기는 더 어렵다. 포용력이 대단히 크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을 비판하거나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부하직원을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최두석 시인은 젊은 시절 애인에게 호박꽃처럼 예쁘다고 한 모양이다. 시인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진정으로 호박꽃이 아름답게’ 생각하여 소신껏 칭찬한 것이다. 문제는 ‘나중에 아내가 된 그 처녀는/긁힌 자존심에 바르르/몸을 떨었’다. 한마디로 실수다.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난다. 먼저 최두석의 시 <호박꽃> 전문을 감상해 보자.      

     

   연애 시절 애인에게

   호박꽃이 아름답다고 말했다가

   파국을 맞을 뻔한 적이 있다

   나중에 아내가 된 그 처녀는

   긁힌 자존심에 바르르

   몸을 떨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땐 나에겐 진정으로

   호박꽃이 아름답게 보였다

   눈요기로 화초를 심지 않는

   농민의 아들로서 호박나물과

   호박떡을 먹고 자란 탓이라고

   애써 변명하고 달래었지만

   미묘한 정감의 속살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으랴

   먹고 사는 것도 좋지만

   분위기도 좀 살려보자는

   핀잔을 주고받으며

   어언 이십 년을 함께 산 지금도

   간혹 아내는 그때의 상처가 덧나고

   여전히 나는 호박꽃이 아름답게 보인다

   호박꽃 초롱을 들여다보노라면

   흙담 위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호박이 어른거린다.

               <호박꽃>, 최두석   

    

  이야기를 개인사에서 정치와 권력으로 옮겨 보자.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군주에게 신하가 <호박꽃> 같은 말을 하여 자존심을 건드리면 죽든지 귀양을 가든지 벼슬을 잃을 것이다. 다행히 어떤 지적이나 반대라도 품을 수 있는 그릇을 갖춘 군주라면 다행일 것이다. 역사에는 그래서 곧이곧대로 말했다가 목이 달아난 충신 이야기가 많다. 반면 입안의 혀처럼 굴어 개인의 영달을 꾀한 간신은 많다. 충신이야 역사에 멋지게 이름을 남겨 영광이라고 하겠으나 지혜롭지 못하다. 한나라 때 원앙 이야기를 들어보자.     

 

  원앙(袁盎)은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사리에 맞지 않으면 소신껏 자기주장을 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승상 강후 주발은 조회를 마치고 물러 나올 때 모습이 의기양양하였다. 황제는 그런 강후를 정중하게 대하였고 심지어는 물러갈 때마다 손수 배웅하였다. 그러자 원앙이 황제에게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승상을 어떤 인물로 생각하십니까?”

  “국가와 안위를 함께 하는 사직지신으로 알고 있소.”


 그러자 원앙이 이렇게 말하였다. 

  “강후는 사직지신이 아니라 공신에 불과합니다. 사직지신이란 군주와 존망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후는 여씨 일족이 정권을 독점하던 여태후 때 태위로서 병권을 쥐고 있었읍니다만 여씨들이 마구 왕에 책봉되어 마침 내는 유 씨의 명맥 마저 위태로웠는데도 이를 바로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여태후가 돌아가신 것을 기회로 대신들이 일치단결해 여씨 일족과 맞서자, 마침 병권을 쥐고 있던 관계로 우연히 공을 거두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공신이기는 하지만 사직지신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승상은 교만한 태도를 보이며 또 폐하께서는 겸손하게 그를 대하고 계십니다. 이는 군주와 신하가 다 예를 잃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폐하께서 취하실 바가 아닌 줄로 아옵니다.”


  그 뒤로는 황제는 조회 때마다 위엄을 보였고 승상은 차츰 황제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강후는 원앙을 보자 이렇게 꾸짖었다. 

  “나는 그대의 형과 친한 사이다. 그런데 그대가 조정에서 나를 헐뜯는단 말인가?”   그래도 원앙은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그 뒤 강후가 승상에서 물러나 자신의 봉국으로 돌아간 후의 일이다. 어떤 자가 강후가 반역을 꾀한다고 밀고해왔다. 강후는 옥에 갇혔으나 종실과 대신들은 누구 하나 강후를 위해 변호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원앙만이 강후의 무죄를 분명히 주장하고 나섰으며, 강후가 무사히 풀려나는 데는 원앙의 노력이 컸다. 원앙은 공명정대한 인물임은 틀림없다.      


  황제가 상림원에 가면서 황후와 신부인(愼夫人)을 동반하였을 때였다. 황후와 신부인은 궁중에서는 언제나 같은 줄에 자리를 하고 앉았기 때문에 여기서도 관리가 같은 줄에 자리를 폈다. 그러자 원앙은 신부인의 자리를 뒷줄로 끌어내렸다. 신부인은 화가 나서 자리에 앉기를 거절하고 황제 역시 기분이 언짢아 자리에서 일어나 궁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자 원앙은 즉시 내전으로 들어가 황제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설명하였다.


  “제가 듣건대 ‘존비의 순서가 확립되어 있으면 상하가 화목하다.’ 하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이미 황후를 세우셨으니 신부인은 첩입니다. 첩과 정처가 같은 자리에 앉아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높고 낮음의 분별을 잃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그처럼 신부인을 사랑하시면 후하게 금품을 하사하실 일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신부인을 위하는 일은 실상 신부인에게 화가 되는 일이 옵니다. 폐하께서는 설마 저 인체의 일을 모른다고 하지 않으시겠지요?” 이에 황제는 기뻐하며 신부인을 불러 그 까닭을 말하였다. 이에 신부인은 원왕에게 황금 50근을 내렸다.      


  위 두 가지 사례를 보면 원앙은 원칙주의자이며 한편 사리 분별이 정확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자칫 주변 사람에게 원한을 살 수도 있다. 아무리 그릇이 큰 임금이라도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 신하가 마냥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앙은 황제(경제)에게 몇 번씩 상소를 올렸으나 한 번도 채택된 적이 없었다. 그는 결국 병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뒤 서민들과 어울리면서 투계와 투견 놀이를 즐기면서 세월을 보냈다.


  원앙이 벼슬을 내놓은 뒤에야 황제는 때때로 그에게 사신을 보내 정책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아우인 양왕이 후손의 지위를 요구했을 때에도 경제는 원앙에게 의견을 물었다. 원앙의 반대로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는데 양왕은 이에 앙심을 품고 은밀히 자객을 보냈다. 자객이 관중으로 들어가 원앙을 탐색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모두 원앙을 칭찬하고 있었다. 자객은 원앙에게 만나기를 요청했다.    

 

  “저는 나리를 죽이기 위해 양왕에게 고용된 자입니다. 그러나 인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나으리 같은 인물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 뒤에도 자객이 10명 이상은 대기하고 있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 뒤부터 원앙은 우울하게 지냈다. 자객의 말을 뒷받침하듯이 그의 신변에 잇달아 괴상한 일들이 발생했다. 그는 점을 치려고 배생이라는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안능(혜제의 능)의 성문 근처에서 뒤따른 자객의 칼에 죽었다.      


  원앙의 끝이 안타깝다. 원앙과 다산 정약용은 비슷한 데가 있다. 정약용과 서영보에 읽힌 악연을 따라가 보자. 다산은 33살 젊은 나이에 암행어사로 경기북부지방을 감찰하게 되었다. 서용보의 친척 집안사람이 꾀를 부려서 향교 터를 묘지로 삼고, 땅이 불길하다는 소문을 내서 유림들을 협박해 향교 명륜당을 헐고 옮기려 했다. 다산이 이 사실을 적발하여 곧바로 그자를 체포하여 처벌하였다. 당시 서영보는 경기도 관찰사였다. 다산은 서용보가 임금님의 행차가 과천행으로 금천방향으로 다니지 않았는데도 임금의 행차를 핑계로 금천의 도로 보수비를 높게 책정하여 받아낸 것을 적발하여 임금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이런 일들로 다산과 서용보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문제는 정조 사후에 일어났다. 정순대비와 순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서용보는 노론벽파로 신유사옥 때는 우의정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라 다산을 재판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산 삼 형제는 모두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정약종은 참수당하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유배를 당한다.


  많은 대신이 두 형제를 석방하자고 하였으나 서용보가 강력하게 반대하여 유배령이 내려졌다. 또 1803년 강진에서 유배 생활하는 정약용을 풀어 주라는 정순대비 명령이 떨어졌으나 이때도 서용보의 방해로 해배되지 못했다. 1810년 아들 학연이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여 다시 해배 명령이 내려졌으나 홍명주, 이기경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1818년 서용보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19년 겨울에 조정에서 다시 논의가 있어 다산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으나 이때도 서용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말하는 지혜를 관중에게 배울 필요가 있다. 이런 관중을 지혜를 캐나다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타오돤팡(陶短房)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유소영 옮김중앙북스, 2014. 19) 에서 이렇게 분석해 놓았다.     

  간언하는 최고의 방법은, 먼저 황제의 말을 따른 후 우회적인 방법으로 황제가 스스로 깨우치게 해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탕 한 알로 거이 구이 얻기’ 기술이다. 


  제환공은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호색한에 사냥도 좋아했다. 환공 자신조차 이런 자신을 멋쩍어했을 정도다. 그러나 관중은 이런 그에게 “그게 뭐 대수롭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사냥도 하고, 첩도 두고 싶은 만큼 맘껏 둬도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재를 가려 발탁하고 역량을 발휘하도록 할 것이며, 알랑거리며 비위나 맞추는 조무래기들을 지도자 대열에 넣어 상황을 그르치지 않는다면’ 이라는 전제 조건을 걸었다.     

 

  사냥과 계집질은 ‘사탕 한 알’이요, 인재 등용과 대권은 ‘거위 구이’다. 관중은 우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탕 한 알’로 제 환공을 달랜 후 내친김에 간부의 임명 동의 권한 문제를 내걸어 이를 얻어냈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는 맘껏 풀게 하고, 중요한 일에는 조건을 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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