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갈지, 누굴 만날지, 왜 가는지 모르는 여행의 시작
집 근처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정겨운 아날로그 벽시계의 초침이 오전 6시 5분을 지나고 있었다. 휴일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대합실은 썰렁했다. 가벼운 등가방을 둘러맨 나는 매표 직원에게 요청했다.
“지금 바로 출발하는 표 주세요.”
“어디 가시는 거죠? 도착지요?”
“어디 가는 건 아니고, 지금 가장 빨리 출발하는 버스로 주세요.”
아침부터 목적지도 없이 떠나는 수상한 승객의 출현에 직원은 어리둥절했다. 도착지가 강원도 원주인 표를 들고 버스에 올랐다. 고속버스는 굉음을 뚫고 질주했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느긋하게 기대서 비몽사몽 가수면에 빠졌다. 홀가분함 속에 긴장감, 그리고 설렘. 바로 이 맛에 떠나는 혼자 여행이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 누구를 만날지, 무슨 일을 할지, 언제 돌아올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 묻지 마 여행 중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중간 경유지인 ‘문막’에 들른다는 안내 방송에 귀가 솔깃했다. 서둘러 등가방을 챙기고 차 문 쪽으로 나갔다. 원주는 이미 수차례 가보았고, 문막 휴게소도 태백준령을 넘기 전에 항상 들러서 익숙했지만, 정작 문막 땅을 밟은 적은 없었다. 버스가 떠난 문막 정류소엔 나 홀로 서 있었다.
도로 주변의 가옥들 대부분이 1층이었고, 가끔 허름한 다방 간판이 달린 3층 건물이 그나마 고층에 속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빌딩을 올려다보기만 하다가 갑자기 펼쳐진 뻥 뚫린 드넓은 하늘 때문인지, 마치 외국 공항에 도착해서 겪는 이국적인 시차 충격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찬찬히 살펴보니, 내가 서있는 자리는 장터이자 시외버스 터미널이 위치한 번화가인 듯싶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침을 해결할 만한 곳이 없었다. 현지 맛집은커녕 동네마다 흔한 24시 해장국집, 콩나물 국밥집도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편의점을 찾아냈다.
도시의 편의점은 좁은 면적에 최대한 많은 상품을 진열하는 벌집 칸막이지만, 이곳 매장은 1층 전체를 차지하고 3면 벽에 거치한 진열대가 전부였다.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컵라면 코너가 거의 분식점 크기였다. 이런 낯선 곳이 좋다. 낯선 여행지에서는 잠들어 있던 수조 개의 내 몸의 세포가 모두 깨어나기 때문이다. 익숙한 집 앞의 마트나 승용차 출퇴근길 주변 풍경은 생각나지 않는다. 익숙함이란 관성적이고 기계적이란 뜻이다. 낯섦은 각성이다.
뚜벅뚜벅 걸었다. 동서남북 구분 않고 논밭을 낀 큰 도로를 따라 막연히 걸었다. 돌이켜보면, 여행다운 여행의 시작은 대학 때 전국 일주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경주 수학여행이 있긴 했지만, 교실을 나왔다는 해방감과 닭장 같은 버스와 철창으로 가로 막은 집단 숙소가 강렬했다. 집 떠나면 곧 여행인 시기였다. 나름대로 모범적인 중고교 생활을 인내하며 버텼던 원동력은 ‘대학에 가면 그동안 못해봤던 일을 마음껏 하리라’였다.
대학 1학년 기말고사를 마치자마자 텐트와 배낭을 군장처럼 짊어지고, 친구 4명과 대장정에 나섰다. 서울역에서 출발했지만 기차가 아니라 두 발로 걷는 도보 무전여행이었다. 용산, 한강 다리, 평택, 천안, 공주, 대천 해수욕장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때 도로를 하염없이 걷던 막연함이란! 오늘 문막 길에서의 막연함과 다르지 않다. 의욕 넘치게 출발한 우리 일행은 2명이 중도에 포기하고, 나와 그 친구는 옷 한 벌, 버너와 코펠만 남기고 잡다한 여행 용품은 전부 택배로 집으로 돌려보내, 홀가분하게 완주를 다짐했다.
낮에는 걷고 밤에는 완행열차인 비둘기호를 타서 잘 곳을 해결했다. 완도, 삼천포, 부산, 포항, 강릉, 그리고 드디어 버스로 서울에 도착했다. 한 번 여행에 물꼬를 트자 거침이 없었다. 방학이 되면 각도의 국립공원 정상에서 완등 기념사진을 남기고, 혼자 인천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 일주 도보여행도 주저하지 않았다. 어딜 가나 처음 가는 곳이었기에, 당시 여행이란 곧 세상 구경이었다. 관광안내서에 나오는 유명 관광지는 거의 다 발도장을 찍었고, 신혼여행을 끝으로 집과 직장을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생활에 적응했다. 집 떠나는 여행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중년이 되면서 직장, 동창회, 동호회 여행이 잦아졌다. 여행이 사람 만나는 사교가 된 것이다. 덩달아 카메라 앞에서 틀에 잡힌 표정으로 단체 포즈가 많아졌다. 문득문득 낯섦이 그리워질 때면 승용차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처럼 돌아다녔다. 속초 등대, 동해 일출 기차, 단양 팔경 내륙 유람선... 하지만 그럴수록 설탕 음료수를 들이킨 것처럼 여행에 대한 갈증은 더해만 갔다. 그 팽팽한 여행의 긴장감은 어디간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 못되었을까?
승용차를 이용하면서 여행 거리가 대폭 늘어나고 어디든 한나절이면 당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낯섦이 아니라 목적지를 찍고 오는 성취감에 불과했다. 여행도 많이 하면 굳은살이 박이나 보다 싶었다. 몇 해 동안 여행을 접고 말았다.
문막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나는 마냥 걷고 걸었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허기가 몰려왔다. 논밭 사이로 가끔 널찍한 터를 차지한 공장이나 연구소가 나왔지만, 구멍가게는 없었다. 태백준령 자락이라 농부마저 드물어 걸어 다니는 행인이 없으니 가게가 있을 리 없었다. 열댓 걸음마다 나타나는 도시 편의점과는 별세계였다.
그때였다. 공사 중인 고가 교각 아래에 반짝이와 점멸등으로 장식한 아담한 통나무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황량한 협곡에 낭만 카페라니!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두툼한 목재 출입문을 밀고 들어오는 나를 발견한 여주인은 화들짝 놀랬다. 이 시간에 근무복을 입지 않는 낯선 얼굴의 출현이 당황스러웠나 보다. 알고 보니 건설 회사가 오지에서 근무하는 직원들 복지를 배려해 마련한 이동 카페였다. 메뉴판엔 각종 커피 이름이 적혀있었다. 주인장은 헐떡대는 내게 시원한 냉커피를 권했다. 나는 요기할 것이 필요하다며 벽에 붙은 특별 메뉴인 미숫가루를 주문했다. 누런 미숫가루 가득 한 사발과 쟁반에는 주문하지도 않은 초코파이, 사탕이 수북했다. 이러저러 이야기를 하다가 근처에 기차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자석처럼 이끌려 철길을 찾아냈다. 드디어 발견한 간이역은 ‘동화역’이었다. 처음 듣고, 보는 기차역을 발견한 기쁨이란!
다음 기차까지는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대합실에서 나와 작은 광장 벤치에 몸을 기댔다. 둔탁한 등산화를 벗고 발을 쭉 뻗자 ‘아그그~’ 신음이 절로 터졌다. 힘줄 한 가닥 한 가닥이 느슨해지는 노곤함이 밀려왔다. 말에게 채찍질하듯 부리기만 했지, 발바닥이며 종아리, 허벅지에서 전해지는 신호를 온전하게 감지하는 게 얼마 만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명한 하늘에 돛단배처럼 흘러가는 흰 구름에 시선을 맞추었다. 내 다리가 빠른 초침이라면, 구름은 분침이요, 저 태양은 시침 이리라. 구름의 시간에 톱니바퀴를 맞추니 새로운 시간이 흘렀다. 하늘은 지구의 대기가 이동하는 거대한 시계다. 밤하늘이었다면 별들의 톱니바퀴에 맞추어 우주의 시간을 여행했으리라.
심드렁해졌던 여행을 다시 시작하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불쑥 부산의 자갈치 시장이나 구경해볼까 싶어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부산행 버스 시간표를 보니 1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기껏해야 갯장어 한 접시를 해치우자고 멍하니 시간을 죽이자니 짜증이 치밀었다. PC방을 찾았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했다. 당장 출발해서 1시간을 벌었다 치자. 뭐가 달라지지? 시간 절약?
그때, 아차 싶었다. 몇 시에, 어디에 도착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나를 발견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여행은 완수해야 하는 미션이 되어 있었다. 보고서 쓰는 회사 출장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매표직원에게 달려가 부산행 표를 돌려주며 주문했다.
“바꿔주세요. 지금 가장 먼저 출발하는 차표로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겠다는 짐을 내려놓으니, 앞일에 대한 설계도, 걱정도 사라졌다. 예전에 전국 일주할 때 텐트와 여분의 옷가지를 돌려보낼 때처럼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오롯이 바로 이 순간, 지금만 집중하게 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 ‘지금’ 여행은 이전의 낯선 모험 여행과는 또 다른 세계였다. 뭐랄까... 마치 물고기가 여울에 멈춘 듯 붕 떠서 빠른 물살을 즐기듯, 이 순간의 ‘지금’이란 시간의 물살에 떠서 매끈매끈하게 헤엄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충북 제천이었다. 낯선 버스 정류장에서 두리번거리던 나는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치악산으로 향했다.
예전 같으면 치악산에 올라, 마땅히 온라인에 전시할 정상 기념사진을 남겼을 터이지만, 이제 그런 욕망이 사라졌다. 나 스스로 즐기면 그만이지, 굳이 누구에게 여행 경로와 성과를 인정받는 성취에 목맬 필요가 없었다. 얼마나 갔을까. 치악산행 버스에서 무작정 내려 수목원 길을 걸었다. 목판화 박물관 이정표를 발견했다. 홀린 듯 따라 들어갔다. 아, 이런 산속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총망라한 목판화 역사박물관이라니! 각 나라의 지식 문화의 진화 이정표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행로도, 시간도, 목적도 없는 묻지 마 여행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동화역에서 기차를 타고 동으로 갔는지, 서로 갔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아마도 묻지 마 여행은 동화 간이역까지였는가 보다.
이 순간, ‘지금’이란 시간의 발견은 내게 신세계였다. 나무의 시간, 동물의 시간, 구름의 시간, 별의 시간 같은 무수한 시간대의 세계로 갈아탈 수 있는 시간의 환승통로였다. ‘지금’ 여행의 장점은 시도, 때도, 장소도 안 가린다는 것이다. 잠들기 전, 머릿속을 뛰어다니는 어제로부터 이월된 근심과 환희, 내일의 걱정과 희망을 지웠을 때 나타나는 이 순간이란 시간의 물살에 올라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면 나를 벤치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앉아 시간이나 죽이는 한량으로 취급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한창 묻지 마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