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에서 낙오한 조선의 자화상
엄동설한임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남산(목멱산)에 올랐다. 정월 대보름이면 학창 시절 동아리 회원들과 여기서 달맞이를 하곤 했다. 한강을 등지고 남쪽에서 출발하여 잘 단장된 둘레길을 따라 올랐다. 새로 축성한 성곽을 지나자 하늘을 찌를 듯 뾰족 타워가 위압적이다. 타워를 한 바퀴 탑돌이 하고 정상에 오르자 남쪽으론 탁 트인 한강이, 북쪽으론 빌딩 정글이 죽 펼쳐졌다.
서울은 크게 바깥의 4개 산[외사산(外四山)]과 안의 4개 산[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사산은 동쪽의 용마산, 남쪽의 관악산, 서쪽의 덕양산(행주산성), 북쪽의 북한산이요, 내사산은 북쪽의 북악산, 동쪽의 낙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이다. 한양 도성이란 바로 4개의 내사산을 연결한 둘레 약 17km에 달하는 성곽을 말한다. 북악산을 중심으로 우로는 인왕산, 좌로는 낙산을 거느린 파란색 청와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옛날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점지한 무학대사의 일갈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지 않으면 왕실과 국운이 흉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장남을 뜻하는데, 북악을 주산으로 삼으면 좌청룡인 낙타산 산세는 허약하고 우백호인 인왕산이 강하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장남이 요절할 것입니다.”
실록에 이보다 더 독한 직설 기록이 또 있을까. 저주에 가까운 경고에도 불구하고 궁궐은 북악산 아래에 들어섰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왕실 장남들이 줄줄이 요절했다. 왕좌를 둘러싼 골육상쟁 피바람이 가실 날이 없었고, 대사가 예고한 대로 200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외침으로 인한 전화(戰火)가 끊이질 않았다. 결과적으로 무학대사의 경고는 헛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전히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며 북악산 아래 청와대가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출범도 순탄치 않았다. 일제 강점기, 남북 분단, 6.25 전쟁으로 신음했고, 청와대의 주인들은 비명에 가거나 줄줄이 감옥행을 면치 못했다. 아직까지도 무학대사의 경고가 유효한 것일까?
사람의 팔자처럼, 산천도 타고난 팔자가 있을 게다. 고사리가 많이 자라면 음지요, 활엽수가 울창하면 양지인 것처럼, 그 터전에 사는 인간 군상을 보면 그 땅의 팔자를 읽을 수 있다. 예로부터 남산엔 전국의 봉화가 집결해서 모이는 봉수대가 위치하고, 현대 최초의 방송국을 상징하는 남산 타워가 우뚝 솟아있다. 영화의 메카 충무로, 용산 미군 기지, 이태원과 한남동의 외인촌과 호텔촌, 국립극장...
한양의 풍수지리상 남산은 오행에서 양기 최강인 남방 화(火)에 해당한다. 그래서인지 산에서 불이 치솟는 봉수대는 가히 화산(火山)의 면모다. 남산 타워는 외형마져 힘차게 발기된 남근 형상 아닌가. 외형뿐 아니다. 봉수대나 타워나, 공히 전국의 소식이 왕래하는 전국 네트워크가 제 기능이다. 은둔의 왕국 조선의 수도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곳이 남산이다.
남산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교류가 가장 왕성하게 일어나는 풍수를 타고났다. 작금 뱀의 비늘처럼 촘촘히 묶여있는 사랑의 열쇠도 그러하다. 음양 남녀의 사랑이 가장 왕성하게 불타는 증표가 남산 사랑의 열쇠 아닐까. 남산(목멱산)의 팔자는 한마디로 ‘양기 탱천’이다.
무학대사의 경고를 저버렸던 이성계와 정도전의 논리는 이랬다. 임금은 풍수지리의 기본인 배산임수 정남향을 꿰차야 한다는 것. 북악을 뒷산으로 한강을 관망해야겠다는 것이다. 다분히 서책에 충실한 해석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무학(無學)은 학문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선은 학문이 직관을 이긴 시대였다. 남산에 오른 오늘, 무학대사의 뜻을 다시금 새기며, 나름대로 추론을 짜 맞추어보았다.
북악은 음양오행 중 음기 최강인 북부의 수(水)에 해당한다. 음기의 수가 주산이 되어 조선은 은둔의 왕국이 되었다. 가장 핵심은 한강의 위치다. 북악과 마주하고 있는 양기 최강의 남산이 한강 안쪽으로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북악산과 남산 사이에 강물이 흘렀더라면 음양이 중화될 터이지만 물이 밖으로 밀려나는 바람에 정면에 타오르는 화기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게다.
그래서인지 한양은 전화(戰火)로 여러 번 불타게 되었다. 아마도 이 때문에 무학대사가 굳이 동향을 주산으로 강권했는지 모른다. 만약 서쪽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았다면 어땠을까? 마주한 낙산이 주산의 앞을 막지 못하니 주산의 의지가 거칠 것 없을 테고, 좌청룡을 북악산으로 우백호를 남산으로 삼음으로써 음양을 든든하게 거느리니 내치와 외치가 순조로워 국운이 탄탄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달나라를 오가는 21세기에 음양오행을 가치관으로 받들고자 함은 아니다. 지금에도 여전히 곱씹어야 할 핵심이 있다. 바로 역사를 보는 가치관이다. 남산의 역사를 처음 알게 된 건 교과서에 실린 수필 ‘딸깍발이’를 읽고 서다. 딸깍발이란 생계는 뒤로한 채 사서삼경만 끼고 벼슬 한자리 못한 지지리 궁상 남산골샌님을 일컫는다. 그런데 글 말미엔 현대인이 딸깍발이의 의기와 강직한 청렴의 정신을 배우자고 끝을 맺고 있다. 지금 생각하니 딸깍발이에게 절실히 배울 시대정신은 완고한 고집이 아니라 반면교사였다.
1940년대 일제가 잠수함과 세계 최대의 군함을 건조할 때 조선의 과학기술과 문화의 좌표는 어땠는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한글을 창제했음에도 경전만 맹꽁이처럼 암송했을 뿐, 인쇄에 기반을 둔 대중문화는 싹도 트지 못했다. 거북선, 우주 천체도, 로켓 미사일격인 신기전을 발명한 과학기술은 퇴보하여 400년 뒤엔 나사못 하나 못 만들었던 절대 암흑기가 아닌가. 남산 딸깍발이는 개화에서 낙오한 조선의 자화상인 게다. 어정쩡한 민족 자긍심 고취보다는 우물 안 개구리 시절에 대한 참회가 역사에서 더 절실하게 배울 점이다.
한반도는 여전히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요동치고 있다. 학벌이 신분에 결정적이며, 관료주의가 만연하고, 외교 국방은 우물 안 개구리다. 무학대사의 경고가 유효하다면, 한반도의 시계는 여전히 조선 600년의 연장선이다. 남산은 여전히 활화산처럼 활활 화기를 내뿜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