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이 아니라 행정구역이 아닐까
용인 지역의 향토사학자들 사이에는 공안이 하나 있다.
‘처인성(處仁城)이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고려 당시 세계를 제패한 몽고군의 2차 침입을 물리친 처인성 전투의 격전지가 바로 용인 처인성이다. 그러나 처인성이 어디 있었는지 그 위치 논쟁이 분분하다. 무사의 갑옷이 발굴되었다는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지금의 처인성 승첩비가 세워진 터는 일부 학계에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성이라고 하기엔 사방이 휑하니 뚫린 평지에다가, 부서지기 쉬운 토성이고, 기마가 한 발에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축성의 높이도 턱없이 낮다. 막강한 몽고 기마병을 상대하기에는 아마추어가 봐도 얼른 납득이 가질 않는다. 학술지에 의하면 7-80년대 중장비를 써서 인위적으로 조성된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
대체 처인성은 어디 있을까? 성이라면 세월에도 마모되지 않는 단단한 돌로 쌓았기에 축성석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을 터인데, 수십 년간 학자들이 탐사했음에도 왜 그 모습은 드러나지 않을까? 필자도 이 의문에 동참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한창일 때다. 흙먼지 뽀얀 비포장도로를 달려온 가축 운반 트럭에 30여 마리의 돼지들이 코를 벌름거리며 꿀꿀거렸다. 회초리를 든 도축장 도부들이 돼지들을 계류장으로 몰고 들어갔다. 전날에도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고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출근한 도축장 사장님이 내게 마을 주막에서 얻어들은 정보를 던지며 인사를 대신했다.
“등급사님, 점심때 저기 위로 사금파리나 주우러 가십시다.”
사금파리? 이런 오지에 뜬금없이?
당시 나는 용인 서리 도축장에 파견되어 소와 돼지의 도체에 육질 등급을 부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도축장이 혐오시설이다 보니 자가용이 없이는 출퇴근이 어려운 외곽에 자리 잡기 일쑤인데, 말이 용인이지 이곳 처인구 서리도 오지였다. 점심 식사 후, 반신반의하며 발길이 드문 계곡으로 향했다.
서리 산자락엔 계곡의 갈래가 많아 틈날 때마다 새로운 산책로를 개척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 번은 길 좋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거친 아스팔트가 깔린 옆길 개울가에 얼핏 보기에 사람의 해골로 보이는 둥글고 흰 물체가 죽 도열되어있는 게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가보니 해골이 아니라 오토바이나 경주용 자동차 안전 헬멧 안에 들어가는 단단한 외부 보호 틀(아우터 쉘)이었다. 기술자들이 흰색 강화 도료를 분사하여 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니 골골마다 작은 창고들이 산재해 있었고, 거기엔 어김없이 도색하고 말리는 아우터 쉘이 도열되어 있었다. 작은 트럭이 한 대 내려와 마주쳤는데, 짐칸 앵글 속에는 아우터 쉘이 빼곡히 실려 있었다. 마름 작업을 마친 쉘을 수거해가는 모양이었다. 이 쉘들은 도축장으로 들어오는 초입로에 거대한 헬멧 모양의 특이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알고 보니 서리에는 전 세계 점유율 1위의 헬멧 공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계곡 전체가 안전 헬멧 공장이었던 것이다. IMF가 터지고 기업들이 휘청거릴 때,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해 중소기업 모범사례라며 방문한 공장이기도 했다.
반신반의하며 사금파리 계곡에 들어섰다. 작은 사찰을 품고 있는 산비탈이 나왔다. 아, 정말이었다. 깨진 기왓장처럼 보이는 사금파리가 산등성이 한 면에 뭉텅이로 드러나 있었다.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인근 경기도 광주에는 조선 왕실용 백자를 납품하는 관요와 이천, 여주에 도공들이 거주하는 대규모 가마골이 있고, 안성 유기그릇이 유명하지만 용인 산골에 가마터는 매우 의외였다. 투박하고 누런 사기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광주, 여주, 이천에서 열리는 도자기 축제에 여러 번 구경 가서 익힌 바 있어서, 조선의 백자와는 사뭇 때깔이 다르기에 한눈에도 시대가 다른 요지임을 짐작케 했다. 역시나 몇 년 뒤 발굴단이 발표하길, 고려 백자의 시초인 ‘서리 백자 요지’라며, 이곳에서 시작한 백자가 조선에 들어 광주, 이천, 여주로 전파됐다고 한다. 지금이야 뿌연 흙먼지 풀풀 날리는 오지 일지 모르지만, 그 옛날 서리는 불을 다루는 기술자들로 북적이는, 지금의 제철소와 같은 대규모의 산업단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는 게 있었다.
“아, 그래서 살리타가 여기로 왔겠구나!”
살리타는 고려 시대 2차 몽고 침입을 이끈 적장이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살리타의 기병들은 광주성에서 주춤한 뒤, 처인성에 당도해 처인 주민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승장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그만 목숨을 잃고, 몽고군은 남하하다가 결국 원정을 되돌리고 만다.
그런데 처인성 전투는 사학자들에게 몇 가지 숙제를 남겼다. 그중에 하나가 왜 몽고의 주력부대가 이런 외진 곳에서 적장이 목숨을 걸 만큼의 대규모 전투를 벌였냐 하는 점이었다. 기록을 찾아보니 고려 시대 서리는 천민 집단인 부곡이었는데, 군창(軍倉)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군창을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무기 보관창고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한참 떨어진 이 지역에 왜 무기를 보관했을까? 살리타가 무기가 부족해 서리의 군창을 털려고 광주를 거쳐 험준한 산맥을 거쳐 이곳까지 왔을까?
또 하나의 의문점은 고려 정규군들도 추풍낙엽일 정도로 악명 높은 몽고 기병을 용인 부곡의 백성들이 어떻게 물리쳤냐는 점이다. 품고 있던 이런 의문이 가마터를 보는 순간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서리는 단순히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었다. 무기 제조 공장, 즉 지금으로 치면 군수산업단지였던 것이다. 나름대로 근거는 이렇다.
고려 시대 무기의 주재료는 금속과 가죽이다. 금속은 칼날과 화살촉을, 가죽은 갑옷, 투구, 화살통, 말안장 등의 재료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용인의 문수봉 뒤에 위치한 백암 지역은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돼지 축산 단지였다. 논농사를 짓는 이천 지역 덕분이었는지 일소로 쓰는 한우도 풍부했다. 지금도 이천, 안성, 광주 지역은 한우 사육으로 유명하다. 고려 시대에는 서리 인근에 대규모 가축 단지와 도축장이 위치했을 개연성이 크다. 도축을 하거나 소, 돼지 가죽을 가공하려면 용수가 풍부해야 하는데, 서리 계곡마다 물이 풍부하다. 서리 인근 지명에는 물이 솟는다는 용천이란 곳도 있다. 오래된 용천 목욕탕이 있어서 자주 가곤 했었다. 물이 풍부한 서리 지역은 축산 단지가 인접해 소, 돼지가죽을 가공하기에 안성맞춤인 입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가마터에서 보듯 서리에는 금속을 벼릴 수 있는 대규모 용광로(대장간)가 있었다. 대규모 축산 단지이자 무기 제조 공단이었던 것이다. 살리타가 어디서 김윤후의 화살을 맞았는지도 학자들 사이엔 숙제였다. 일설에 의하면 살리타가 서리 인근에 매복한 김윤후 일행에게 눈 아래를 화살에 맞아, 고기를 거는 갈고리로 벌려 화살을 뺏으나 후유증으로 얼마 안 가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서리에는 도축장이 위치했음을 뒷받침한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필자가 근무했던 그 도축장은 의외로 오랫동안 도축장의 명맥을 유지해온 유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깨진 사금파리를 맞추듯 고려 시대와 현재를 겹쳐보았다. 헬멧 공장도 예사롭지 않았다. 고려 시대 투구와 갑옷을 만들던 명맥이 그대로 이어진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처인구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인상적인 광경이, 산 너머에 있던 국궁장이었다. 까마득히 서있는 과녁에 화살이 탁 명중하자 ‘지화자’하며 합창하는 궁사들의 탄성이 신기했다. 활 쏘는 오랜 전통의 흔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리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는 용인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 유도대학의 전신이다. 옛날 같으면 무관을 양성하는 교육기관 아닌가. 서리는 무기를 보관하고 만들 뿐 아니라 신무기를 연구하고 시험하고 무사를 양성하던 군산학 복합단지였음을 점칠 수 있다.
용인에는 현재 지상군 사령부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최근 모기업에서 대규모 반도체 생산 단지를 조성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반도체는 21세기 도자기라고 한다. 흙으로부터 세라믹을 가공하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과 반도체 전쟁을 제2차 도자기 전쟁이라고 했다. 땅도 팔자가 있는 걸까. 불로 흙을 벼리는 반도체 산업이 다시 부흥한다니 신통방통하기만 하다.
나는 서리를 중심으로 용인대학 뒷산인 부아산, 근처에서 해발이 가장 높은 석성산, 가파른 문수봉 등 인근 산맥을 둘러보며 탐사를 했지만, 성돌 같은 처인 성곽의 흔적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면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한 곳에서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얼마전 수원(용인) 광교산(582m)에 올라 김준용 장군 전승비를 발견하고는 잠재했던 기억이 번쩍 되살아났다. 광교산 정상에서 남한산성을 바라보는 북쪽(용인 쪽)의 산세가 용인 처인구 인근의 문수봉과 매우 흡사한 게 아닌가!
김준용 장군은 강원도 원주 출신의 무신이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조선의 국경 수비대와 수도 방위대, 전국에서 출병한 근왕병들은 막강한 청나라 기병대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런데 호남에서 출병한 김준용 장군만이 오직 혁혁한 전승을 거두었다.
나는 전투의 근거지였던 광교산을 둘러보며 당시 승전의 요인을 살폈다. 청나라의 주축인 기마병의 기동력은 얼마나 신출귀몰했는지, 압록강에서 단 4일 만에 개성에 당도할 정도였다. 정규전에서 조선군은 청군을 제대로 이긴 적이 없었다. 군사와 물자가 부족했던 김준용 장군은 정면승부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광교산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벌였다. 분지처럼 평야를 사이에 두고 먼발치에서 남한산성을 바라보는 용인 쪽 광교산은 거의 벼랑에 가깝게 험준하다. 변변한 성곽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마가 접근할 수 없는 지세였으니, 청군의 군마를 효과적으로 관망하고 제지할 수 있었다. 김준용 장군은 지리를 잘 아는 거주민 의병들과 합세하여 청의 진출입로에 매복하여 기습을 벌여 청 태종의 가장 호전적인 사위 양굴리를 저격 사살하고, 장수 2명과 무려 1만여 명의 청군의 목을 베어 청군의 등골을 서늘케 하는 대승을 거둔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용인 문수봉(해발 400m)에 다시 올랐다. 문수봉은 지금의 와우정사 뒤편의 고지로, 승려인 김윤후가 거주했다고 추정하는 백현원을 품고 있다. 문수봉 산등성이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 패러글라이딩 이륙장으로 쓰일 만큼 급한 낭떠러지다. 분지처럼 탁 트인 전망이 아무리 봐도 광교산 정상과 매우 흡사했다. 인위적인 성곽은 없지만 문수봉 또한 광교산처럼 천혜의 산성이던 것이다. 문득 처인성은 성곽이 아니란 생각이 스쳤다. 발상을 바꾸기로 했다.
성곽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성돌이 발견되었어야 할 터인데, 파편 한 조각도 없지 않은가. 만약 성돌이 남아 있었다면 학술 조사단이 진작 발견했을 것이다. 이 사실은 성곽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방증 아닐까? 기록에 ‘처인성’에서 ‘성’이란 성곽이 아니라 고려 시대 행정구역을 말하는 것으로, 처인성 주민들이 곳곳에서 유격전으로 저항했다는 의미이지, 남한산성이나 행주산성같이 성곽에서 투석 수성전을 벌였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나는 서재에서 몇 년 전 얻은 용인 향토문화원 연구 서적 두 권을 꺼내 찬찬히 살폈다. 처인성의 역사와 문화를 특집으로 다룬 두터운 페이지를 넘기며 고려 시대로 상상의 나래를 폈다.
1232년 몽고가 두 번째로 고려를 침략한다. 당시 몽고 기마병은 보급부대 없이 육포로 연명하며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했기에 그 기동력이 세계 최강이었는데, 보통 식량 조달과 거주가 용이한 여름, 늦가을 사이에 전투를 했다. 그런데 살리타의 계획과 달리 경기도 광주성에서 전투가 길어지는 바람에 가을을 넘기고 11월에 접어들게 되었다. 퇴각할 것인지 고민하던 적장 살리타는 겨울을 나기로 하고 가장 시급한 식량 조달을 위해 유목 민족답게 소, 돼지를 키우는 축산 단지이면서 화살과 무기가 풍부한 용인 군창을 정복하러 떠난다. 지금의 문수봉과 인접한 백현원에 거주하고 있던 승려 김윤후는 인근 광주에서 벌인 살리타의 극악무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부곡 주민들에게 결사 항전을 설득한다.
항복해도 죽고, 항전해도 죽는다!
김윤후가 보기에 처인 부곡은 이미 무기와 식량, 그리고 도축으로 단련된 장정들과 무기 시험 기술자들, 무관 양성 학교가 완비된 잠재력 높은 군대로 보였던 것이다. 이전의 광주성 전투에서 몽고 기마병이 공성전에 약하다는 사실과 식량과 무기가 부족하다는 정보를 얻은 김윤후는 정면충돌을 피하고 식량과 무기를 문수봉 등으로 분산 이동시켜 현지 보급을 차단하는 한편, 지리를 잘 아는 주민들과 곳곳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시간을 끌었다. 식량과 무기가 부족한 몽고군은 다가오는 겨울에 점점 조급해졌다. 문수봉에서 큰 전투가 벌어진다. 하지만 북쪽이 절벽이라 몽고군 특유의 기마 포위 전술은 무용지물이었다. 비까지 내린 가파른 남쪽의 사면은 말굽이 빠져 사람도 오르기 힘든 황토 뻘이었다. 게다가 화살이 풍부한 용인 백성들은 결사 항전으로 화살을 비 오듯 퍼부었다. 퇴각한 살리타는 도축장, 가마터 등 민가가 밀집한 서리로 향하려고 완장리(지금의 승첩기념비 부근)에 진을 친다. 김윤후는 적장부터 제거하는 것이 희생을 줄이는 가장 효율적인 전투라 판단하고, 야간에 처인성 주민과 관군이 합세하여 서리에 진을 치고 있는 살리타의 진영을 기습한다.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지지만 살리타를 죽이는 데 실패하고 후퇴하고 만다. 하지만 김윤후는 완전히 퇴각하지 않았다. 궁사 몇 명을 데리고 살리타를 저격하기로 한 것이다.
김윤후 일행은 지금의 서리 도축장으로 넘어오는 고개의 V자형 산비탈 길목에 매복했다. 언덕 위로 살기등등한 살리타의 모습이 등장했다. 살리타는 대낮에 평지에 저격병이 매복했으리라곤 설마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손쉬운 민가 약탈이라 마냥 방심하고 있었다. 순간 화살 몇 발이 허공을 갈랐다. 그중 한 발이 살리타의 관자놀이와 코 사이에 명중했다. 살리타가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몽고 기마병이 화살을 쏘며 김윤후 일행을 뒤쫓았지만 이미 산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살리타는 일어나 자기 손으로 화살을 뽑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화살대만 부러지고 화살촉은 낚싯바늘처럼 광대뼈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급한 대로 부하 한 명이 인근에 있던 도축장으로 달려가 고기를 걸어놓는 갈고리를 가져와 광대뼈를 벌리고 화살촉을 빼냈다. 두뇌나 눈 같은 급소를 피해서 즉사는 면했지만 상처가 워낙 깊어 살리타는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겨울 초입에 숨을 거두고 만다. 지휘자를 잃은 몽고군은 마침내 철수한다. 조정에서 김윤후의 전공을 치하하려 하지만 김윤후는 자신은 활도 들지 않았다며 목숨을 걸고 터전을 지킨 부곡 백성 전체에게 전공을 돌렸다. 조정에서는 천민 집단이었던 처인 부곡을 처인현으로 전격 승격시켜 용인 백성들 전체의 신분을 상승시킨다.
김윤후는 몽고 4차 침입 때 다시 장수로 발탁되어 충주에서 몽고군을 다시 격파한다. 무적의 몽고군을 두 번이나 격파한 진귀한 기록을 남겼다.
처인성 승전은 가장 미천한 신분의 천민 집단인 처인 부곡민들이 주축이 되어 세계 최강의 몽고군을 물리친 곳이다. 게다가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한 모든 의병들이 신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고루고루 명예를 나눈, 세계 전투사에서 찾기 어려운 자랑거리다. 광교산 전투 또한 민관이 합세한 무명용사들의 피의 승전이었다. 그러나 우리 역사책에는 몽고군의 수탈, 남한산성의 탁상공론, 임금의 삼전도 굴욕, 수원성 세계유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른 나라는 호국의 정신을 고취시키려고 없는 영웅도 만든다고 하는데 우리의 처인성, 광교산 전승은 무명 의병들이 희생하고 관공서에서 지은 번듯한 성곽이 없다는 이유로 야사에나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형편이다. 대대로 계승해야 할 역사의식과 호국정신은 무형의 정신이지 웅장한 유적이나 방대한 왕조실록 유물이 아닌데도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