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한 생이라 했다.
눈을 번쩍 뜨자 새벽 창문이 희미하다. 이불속의 손과 발을 움직여본다. 잠이 길어지면 죽음이 아니던가. 아무 기억 없이 수 시간을 미라 상태로 있다가 되살아나는 의식을 매일 치르지만 늘 신기하기만 하다. 시간이 반복적이며 잠은 모든 것을 되돌려놓는다는 마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래서 하루가 한 생이라 했나 보다.
곧이어 시계의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한 발 앞선 생체시계의 정확성에 감탄한다. 반복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일단 길들여만 놓으면 편리하지만 한편으론 고정관념이란 덫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지금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지만 마음은 벌써 시외버스터미널 매표소에 줄 서고 있다.
어스름한 새벽, 도시를 벗어나자, 날카롭던 군청색 스카이라인이 원만해진다. 하늘이 훨씬 넓어졌다. 일단 차에 몸을 싣기만 하면 차분해진다. 한 달 전, 코앞 지하철로 10분만 가면 되던 서울 근무지에서 생경한 경기도 외곽으로 인사발령 통지를 받았을 때, 70분 × 2(하루 왕복) ×300일 × 10년이란 계산이 머리를 맴돌았었다. 좌석벨트에 묶여있는 일에 체념하고 익숙해질 무렵부터 생각이 자유로워지고 몸도 편해지기 시작했다. 막힌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전환점은 언제나 꽉 막힌 곳에서 시작되나 보다. 고속도로 공사구간을 알리는 약 2미터 간격의 붉은 전구가 푸른 새벽 점점이 선명하다. 버스에 속력이 붙자 간격이 좁아지더니 마침내 붉은 실선의 가드레일이 된다.
내 직업은 축산물 등급판정사다. 정해진 육량(肉量), 육질(肉質) 판정 기준에 따라 도축된 소와 돼지의 도체에 등급을 날인하고 기록하는 일을 한다. 도축과정에서 몸통과 머리, 내장이 분리된 도체를 빈번히 접하는 나로서는 육체의 물질성과 범신론(汎神論)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세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다가 도축 순간 팽팽한 연줄이 끊어지듯 각 분자들이 일시에 산산이 흩어진다. 한 마리의 ‘소’라는 동물은 분명히 죽었지만 그 속에서 근육은 근육대로 심장은 심장대로 꿈틀거리고 있다. 본체가 죽은 지 수십 일이 지나도 세포는 냉장실에서 버젓이 살아있으며, 이마저 죽을 무렵 이를 영양 삼아 또 다른 미생물들의 세계가 번성하기 시작한다. 죽으므로 써 또 다른 사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생명의 전이를 지휘하는 이면의 어떤 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세상의 이치가 풀 한 포기의 존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금을 찾아 엘도라도를 향해 떠나기보다는 연금술을 익혀 주변을 황금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나는 이곳 도축장에서도 키우고 있다.
근무지 근처의 냇가 언저리를 걷고 있다. 햇볕이 내 머리와 어깨를 감싼다. 바람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가을 쑥 향기가 상쾌하다. 발바닥에 전해오는 자갈들의 부드러운 곡면과 바스락 속삭임. 억센 돌 사이로 끊어질 듯 핀 무명 꽃의 위대한 얘기를 들으러 옆에 쪼그려보기도 한다. 신기하다. 같은 나, 같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왜 그리도 험악했었던가. 땅에 구르는 나뭇가지에 발길질을 해대고 돌멩이를 집어 들어 기어코 잔잔한 저수지 수면 위를 깨어놓고야 말지 않았던가. 곰곰이 따져보아도 ‘시인’과 ‘폭군’ 사이에는 나의 마음 상태 이외에 다른 혐의는 찾을 수 없다. 마음 한 장 차이의 결과란.....
요 근처 개울을 끼고 밤나무가 유난히 많다. 툭 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아기 주먹만 한 알밤이 떨어져 있었다. 어느새 밤나무는 수개월 동안 흙 속의 물과 양분을 모아 햇볕을 쪼이고 바람에 씻어 알밤을 만들었던 것이다. 며칠 전에 극심한 수해가 휩쓸고 간 후 생긴 밥주걱 모양의 큰 모래톱 위로 도회지 차 한 대가 멈추었다. 일단의 가족들이 밤 줍는 소리로 떠들썩했다.
아마 밤나무를 처음 본 도회지 아파트 출생의 아이들이었다면, 저 모래톱이 대륙처럼 늘 있었던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밤나무에서 알밤이 수돗물처럼 항상 쏟아지는 걸로 여겼을지 모른다. 내가 당연히 여기고 있던 사실들을 돌이켜본다. 이런 직업을 갖고 이 자리에 서있다니, 이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다니.... 오늘을 결정했던 어제가 분명히 있다고 단정 짓게 된다. ‘내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하루살이와 개구리의 우화가 뚱딴지 같이 떠오른다.
퇴근 후, 목욕탕에 가서 몸 담글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코끝에 젖은 냄새가 촉촉하다. 직사각형의 시외버스 창문은 영화 필름 한 칸이 되어 누런 들녘을 한 장씩 넘긴다. 달리겠다는 육중한 버스의 욕망은 관성을 가속시켜 창가의 불연속 한 컷, 한 컷을 한 편의 활동사진으로 만들어 버렸다.
버스 문이 열리고 첫발을 디딜 때의 심한 무기력감은 중력을 일깨운다. 공간을 할퀴는 바람소리와 빠른 화면 전개에 젖어 아직도 달리고 있는 내 눈과 귀를 다독이며 목욕탕에 들어섰다. 따끔거리기까지 했던 온탕의 처음 열기는 점점 무뎌져서, 손으로 저어야만 온기가 잡힐 정도다. 냉탕에서 온탕으로 급히 자리를 옮길 때의 현상은 재미나다. 내 피부의 모든 온점들은 찬물에 적응이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따뜻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관성은 어디에나 있다. 생각의 관성이 고정관념일 것이다.
출퇴근은 헤어지고 만나는 연습이라고 했던가. 아내의 현관 환영을 건성으로 받아넘기고 애들에게로 달려간다. 출근 이후부터 못다 한 애정까지 퍼붓는다. 첫째 아이 임신 때는 남들처럼 나도 참 유난스러웠다. 태교 이론을 앞세워 몇 질의 책을 완비해 배속에 있는 놈에게 조기교육을 해댔다. 젖 먹고 잠만 자는 지루한 젖먹이의 일과가 반복될 때까지만 해도 유아전문 서적을 탐독하며 초등학교 입학 전 교육 계획 마련에 부풀어있었다.
어느 날부터, 아기는 기를 써서 몸을 뒤집더니 코방아를 찧으면서도 기려고 했다. 어느 날은 또 도깨비 뿔 같은 하얀 이가 삐죽 솟더니 엉덩방아와 무릎 방아를 반복하고는 드디어 한 발자국 걷고야 말았다. 애쓰지 않아도 잘 먹여주고 잘 재워줄 텐데. 교육을 지식 전수라고 생각한 나의 고정관념은 아기의 진화를 목격하고 무기력해졌다.
저마다의 영혼에 내재된 에너지와 자존심을 확인하고 인격체라는 말이 실감 났다. 아이 하는 짓이 지 아비 아기 때와 똑같다는 주위 어른들의 증언에서 나는 흠칫 놀랐다. 아, 굳이 첩첩산중에서 자아성찰에 몰두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눈앞에 증거가 엄연히 재현될 수 있다니.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나이가 다른 내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니.
모두 새근새근 잠든 모양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두고서야 어둠의 고요와 적막도 축복인 줄 알게 되었다. 밤을 은막 삼아 오늘 하루 영상들이 두서없이 넘어갔다. 분명히 같은 24시간이지만 어느 날은 길게, 어느 날은 짧게, 어느 날은 뿌듯하게, 어느 날은 허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 아침부터 일어난 일이 떠오른다. 누락된 부분이 너무도 많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집까지 걸어오는 20분 동안 기억되는 장면이 거의 없다. 출퇴근 차 안에서, 심지어 근무시간 동안도 군데군데만 떠오른다.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관성적으로 움직여왔다는 이외의 설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공히 관성의 법칙을 허용하고 있다는데 주목했다.
사람이 하루를 살면서 땅에 가장 크게 의지하는 때가 누워있을 때라고 한다. 계속해서 옮겨 다녀서 그렇지 걸을 땐 두발 바닥만큼, 앉을 땐 엉덩이 면적만큼만 필요하다. 그러니까 누울 때 가장 큰 땅을 쓴다. 그리고 그 누울 때 크기는 공교롭게도 자신이 땅에 묻힐 때 목관(木棺)의 크기와 일치한다.
생각의 관성은 계속 누리고자 하는 욕심의 연장이 아닐까. 고정관념으로 살지 말고 순간순간을 잘 살아야 한다는 현자들의 질타는 이런 연유에서 일까. 이렇게 치자면 한평생 동안 새로운 생각을 하고 사는 기간을 모아봐야 낮잠 한숨 자는 시간을 넘지 못할 수도 있다. 인생이 풀잎에 맺힌 이슬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수 있다.
참으로 이 어둠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불을 끄면 알 수 있듯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어둠은 참으로 우주 본연의 색깔이다. 내가 응시하고 있는 천장을 넘어, 지구 대기권을 넘어, 저 은하계 끝의 색깔도 이와 같을 것이다. 스르르 졸음이 온다. 감긴 눈, 그곳에도 또한 같은 색깔이 있었다.
하루는 그저 들고나는 일이 대수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