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농 Oct 15. 2021

눈치도 유전인가 봐

 "마농아! 나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어제 쇼핑했어."

 여자 친구의 말에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고 경청 모드를 켠다. 책에서 배운 대로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턱을 받힌 후 그녀를 빤히 응시한다.  

 "그래? 뭐 샀는데?"

 마지막으로 진지한 표정까지 지으며 경청의 자세를 완성한다. 그러자 그녀의 큰 눈이 나에게 몇 초간 머문다. 곧이어 그녀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피식 웃고서 먹던 밥을 계속 먹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요한 면접시험 하나를 치른 느낌이 든다. 그녀는 눈이 땡그랗고 맑아서 어디에 시선을 두는지, 무슨 기분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방금 나를 바라본 시선을 봐서는 합격점을 받을 만한 대답을 하지 못한 것 같은데, 아직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내가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그녀는 이제야 설명을 해주기 시작한다.  

 "마농이는 눈치가 정말 없는 것 같아. 확실히 F가 아니라 T야."

 그녀가 엉뚱깽뚱한 소리를 하길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되물었더니,

 "MBTI 있잖아! 너는 INTJ라며.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눈치도 없으니까 마농이 너는 확실히 T야!"

 

 '눈치'라는 단어를 들으니 머릿속 기억 시계가 중학교 2학년 시절을 가리킨다. 그 당시 학교 분위기는 확실히 요즘과 달랐다. 두발에 자유란 없었고, 선생님들의 권위는 철옹성 같았다. 사회적으로 체벌도 허용하는 분위기였기에 조금이라도 삐딱선을 타는 학생들을 향해서는 거침없는 매질이 오갔다.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파란색 여름 교복을 이제 막 꺼내 입기 시작했을 때였다. 벽에 걸린 선풍기가 힘차게 돌아가던 어느 평일 오후, 오랜만에 자습 시간을 맞은 2학년 1반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하지만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얼마 가지 못했다. 기습적으로 학생들 상태를 점검하러 오신 담임 선생님은 반 분위기가 너무 어수선하다며 모두들 책상 위로 무릎 꿇고 올라가라는 불호령을 내리셨다. 교실 바닥에 의자 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모두들 입을 삐죽 내놓고 책상 위로 슬금슬금 올라간다. 담임 선생님은 굼뜬 우리들의 행동에 가속도를 붙이고자 당구채로 교단을 치며 서둘러 올라가라고 명령하신다.

 "다들 10분 동안 무릎 꿇고 얌전히 있어!"

 익숙한 종류의 체벌이어서 몸은 불편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상황이 달랐다. 나는 책상 위로 올라가기 전 무아지경의 상태로 시오노 나나미 작가님의 '로마인 이야기 5'를 읽고 있었는데, 마침 율리우스 카이사르 장군님이 전쟁 전 병사들을 향해 사기를 증진시키는 명연설을 하는 대목이었다. 2000년의 시간과 먼 한국 땅이라는 공간을 초월해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로마군의 일원으로 장군님에 대한 충성심이 불타 적들을 향해 돌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담임 선생님이 산통을 깨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이 몰입감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골똘히 고민하던 중 번뜩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책상 위로 무릎 꿇고 올라가라고 그랬지, 책을 읽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 벌을 받으며 자습을 하는 거니까 선생님도 분명 아무 말씀 안 하실 거야.'

 이미 하반신으로 가득 찬 책상 위에 기어코 두꺼운 로마인이야기 책을 편다. 꼼지락,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짝꿍 귀에도 들렸나 보다. 책상 위에서 무릎 꿇고 독야청청 독서 중인 나를 보고 짝꿍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귓속말을 한다.

 "눈치 없이 뭐 하는 거야!"


 이 사건이 타인에게 눈치 없다고 한소리 들은 첫 번째 기억이다. 위에 언급해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 나는 타고난 눈치가 부족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학습능력은 뒤떨어지는 편이 아니어서 누군가 하나를 알려주면 정확히 그 한 가지는 숙지한다. 예를 들어 얼굴에 큰 뾰루지가 난 친구에게 굳이 뾰루지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누군가 나에게 가르쳐주면, 나는 그때부터 얼굴에 뾰루지 있는 사람과 대화할 때 뾰루지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출 변형에는 취약하다. 큰 뾰루지가 난 친구가 자신의 얼굴을 봤을 때 뾰루지만 보이지 않느냐고 질문하면,

 "별로 눈에 띄지 않아!"

 라고 말해줘야 좋다는 것은 누군가 나에게 새로 알려줘야 한다. 그래도 27년 동안 눈치를 하나씩 꾸준히 쌓아와서 지금은 겉으로 봤을 때 눈치 빠른 사람처럼 보인다.  

 아, 책상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잠시 로마 군인이 됐던 사건의 결말이 궁금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야기하자면, 책을 편 지 3분쯤 됐을 때 담임 선생님께 발각되어 발바닥을 당구채로 몇 대 후드려 맞고 책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때 새로운 눈치를 하나 적립했다. 벌을 받을 때는 책을 읽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나이별 생활 눈치 지수(index) 그래프를 그려보면, 아마 오늘의 내가 가장 높은 생활 눈치 지수를 자랑할 것이다. 하지만 생활 눈치 지수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다른 종류의 눈치 지수가 있다. 바로 커플 눈치 지수다. 이 둘은 뚜렷한 상관관계가 없어서 생활 눈치 지수가 아무리 올라간다 하더라도 커플 눈치 지수가 동반 상승하지는 않는다. 나의 커플 눈치 지수가 상승하려면 반드시 여자 친구 코멘트들이 쌓여야 한다.

 여자 친구는 황폐했던 나의 눈치 밭, 특히 커플 눈치 밭에 1년 동안 물과 비료를 주며 체질을 변화시켰다. 일종의 갱생이랄까? 그녀는 사귄 지 1년이 지나고 나서부터 한동안 나의 눈치에 대한 피드백을 주지 않았다. 아마도 1년 동안 그 정성을 쏟았으니 이제는 눈치가 알아서 자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만, 얼마 후 잠시 멈췄던 그녀의 눈치 재배는 다시 시작됐다.

     

 여자 친구는 걸음마를 이제 막 뗀 아기들처럼 잘 넘어진다. 가끔은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야 내 마음이 편할 정도다. 하루는 그녀가 주차장에서 넘어져서 무릎이 까진 날이었는데, 메디폼(반창고의 일종)을 상처 난 무릎에 붙이고서 다쳤다며 사진을 찍어 내게 보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축구를 즐겨했기에 땅바닥에 이곳저곳 많이 쓸려봐서 무릎이 까진 게 얼마나 성가시고 아픈지 잘 안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보낸 사진을 보았는데, 아프겠다는 생각보다 앞서서 묘하게 익숙한 물체가 그녀의 상처에서 어른거린다.

 잠시 집중해서 사진을 보니 모양이나 색상 누가 봐도 KF-94 마스크다. 그래서 핸드폰에 내장된 터치 펜을 이용해 마스크 낀 나의 모습을 쓱싹쓱싹 그려서 그녀에게 보내줬다. 내 딴에는 위트 있는 방식으로 그녀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예상과 크게 벗어났다.

 "마농, 뭐 하는 거야!"

 그렇다 이번에도 눈치가 없었다. 아무리 KF-94 마스크가 연상됐더라도 지금 아프지는 않으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였다. 다음 날 그녀와 만나 밥을 먹으며 눈치의 부재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근본적인 질문 하나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마농이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을까?"


여자 친구 무릎에 상처가 나서 메디폼을 붙여놓은 모습이 왼쪽이다. 상처 모양이 KF-94 마스크 와 닮아 오른쪽 사진처럼 그림을 그렸다.

 

 얼마 후 나는 왜 눈치가 없는지 이유가 밝혀졌다.

 우리 가족은 총 4명, 부모님과 나 그리고 여동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 내년 하반기쯤에는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도 오피셜하게 가족이 될 예정이다. 알다시피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관문이 많다. 아마도 그 첫 번째 스텝은 서로의 부모님을 뵙는 자리가 아닐까? 가족들이 지방에 거주하는 나는 서울에 사는 여자 친구에 비해 빠르게 관문들을 통과했다. 교제한 지 100일이 조금 넘었을 때 그녀의 언니 부부를 만났고, 그로부터 또 100일이 지나서는 미래의 장모님, 장인어른과 식사하는 자리를 가졌다.

 2021년 6월 19일 토요일, 만난 지 1년이 조금 안됐을 때 우리는 함께 군산에 내려가 부모님께 인사드리기로 했다. 타고나기를 어른들과의 자리에서 긴장하지 않는 나와 달리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잔뜩 움추러 드는 여자 친구는 군산에 내려가기 일주일 전부터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어떤 선물을 사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커플은 자고로 함께 고민을 나눠야 하기에, 그녀의 고민은 곧이어 나를 향한 질문으로 바뀌었다.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까? 그리고 부모님은 어떤 선물을 좋아하셔?"

 내 눈에는 여자 친구가 뭘 입은들 예쁘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어떤 선물이든 다 좋아하신다.   

 "아무 거나 입어도 다 예쁠 거야!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뭐든 다 좋아하셔!"

 이 순간에도 또 하나의 눈치를 배웠다. 무조건적인 칭찬과 뭉뚱그린 선물 취향은 상대방에게 일절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곧바로 그녀의 옷 스타일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제출했고, 여동생을 통해 부모님의 취향까지 파악해 그녀에게 전달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미혼 남성이 있다면 자신의 부모님이 어떤 선물 취향이신지 정도는 알아두도록 하자.

 우리는 토요일 아침 일찍 만나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군산행 버스를 탔다. 2시간 30분을 열심히 달려서 군산에 도착했을 때, 부모님은 환한 미소로 반겨주셨고, 배가 고프지 않냐며 예약해둔 이탈리안 식당으로 우리를 곧장 데려가셨다. 센스 있게 분리된 룸을 예약하신 부모님 덕에 프라이빗한 식사를 시작하게 됐다. 이제 마스크를 내리고 서로의 얼굴들을 마주할 차례다. 부모님과 여자 친구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기에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여자 친구가 마스크를 내리자 그녀를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식탁 위 첫 멘트를 건네셨다.

 "너무 예쁘게 생겼다! 완전히 동양 미인상인데?"

 맞다. 여자 친구는 상당히 예쁘다. 아마 약사 겸 치과의사 중에서는 최고로 예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양 미인에 서양 미인 분위기를 한 두 방울 섞은 느낌이지 않느냐고 되물으려던 찰나, 아버지의 멘트 하나가 더 날아왔다.

 "어디 고치지는 않았지?"

 

 4명 중 아버지만 빼고 나머지 사람들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해맑은 표정이 더 돋보였던 것 같다. 아마 잠깐의 정적이 흐르던 그 순간 테이블 밑에서 어머니가 아버지 발을 한번 세게 밟지 않았을까? 여자 친구는 곧바로 활짝 웃으며

 "네! 어디 고친 곳 없습니다!"

 씩씩하게 아버지의 눈치 없는 질문에 답변해주었다. 그렇게 강한 첫인상을 남기며 2시간 정도의 식사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곧이어 부모님과 헤어진 후 우리는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긴장이 풀렸는지 지쳐 보이는 그녀를 꽉 안아주며 너무 고생이 많았다고 토닥인다. 그러자 그녀는

 "아냐! 마농이 부모님 만나서 너무 좋았어! 식사도 맛있었고 아버님도 너무 재밌으시던데?"


 출발까지 10분 정도 남은 버스를 기다리며 터미널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식사 자리에서 오갔던 대화들을 마음 속으로 쭉 복기하던 중 아버지의 눈치없는 멘트에서 생각이 덜커덩 멈춘다. 옆에 앉아 있는 여자 친구를 향해 조용히 이야기 한다.

 "내가 왜 눈치가 없는지 알겠어."

 그녀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피곤하니 어깨에 잠깐 기대겠다고 한다. 잠시 눈을 감고 쉬는 그녀를 향해 조용히 혼잣말을 한다.


 "눈치도, 유전인가 봐."

작가의 이전글 입가주름, 제가 펴드릴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