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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농 Oct 02. 2021

나도 많이 걸려봐서 잘 아는데, (2/2)

 20년. 꼬마 시절부터 박대와 식탁에서 부대낀 지 20년 정도 된 거 같다. 이제는 식탁 반대편에서 박대의 얼굴만 슬쩍 봐도 외국물을 먹고 온 친구인지, 몸무게는 120g대인지, 130g대인지 감이 온다. 심지어 임신 여부도 알아차릴 정도다. 이 정도면 종을 뛰어넘은 우정 아닌가? 무엇보다 나와 박대는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자라는 중이다. 아버지께서 예전에는 나와 여동생을 애지중지 키우셨다면, 요즘은 우리 남매보다 박대 이름을 더 입에 달고 사신다.

 집안 교육 엄하게 시키기로 소문난 우리 집에서 자식들이 밖에서 사고 치고 돌아다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우리 집 박대는 예고 없이 남의 목을 함부로 찌르는 그런 친구가 아니다. 지금껏 밥상 위에서 말썽 한번 부리지 않고, 성실히 자신의 소임을 해왔다. 특히 타 생선들에 비해 가시가 적고 비린내도 적으며 살결의 방향이 분명하다. 따라서 힘들이지 않고도 젓가락질 한 번이면 머리에서 꼬리까지 가시 없는 뽀얀 살을 들춰낼 수 있는 아주 기특한 우리 집 식구다. 이렇듯 착하고 매너 좋은 애가 여자 친구의 목 안에서 말썽을 부렸다니 분명 찰나의 일탈에 그치고 말 것이다.   

 

 "침을 삼킬 때 이물감과 통증이 점점 커져. 어떻게 하지?"

 다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지만 당황하지 않고 침착히 생각한다. 가시가 목에 가볍게 박혔다면 이미 몇 번의 침 삼킴으로 이물감이 사라졌어야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진다는 걸 보니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로 예상된다. 가시는 이미 빠졌는데 목 안에 상처가 났거나, 또는 편도 너머로 깊게 박혔거나. 첫 번째 경우라면 걱정, 근심 모두 내려놓고 숟가락을 들어 남은 식사를 재개하면 된다. 만약 두 번째 경우라면 다년간의 노하우로 비추어 보았을 때, 뜨거운 물을 마시며 한두 시간 기다리면 된다.   

 "나도 (목 깊은 곳에 가시가) 많이 걸려봐서 잘 아는데, 뜨거운 물을 마시며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야!"  

 그리고 괜히 항간에 떠도는 민간요법인 맨밥이나 식용유를 한 숟가락을 먹는 건 자제하라고 설명해준다.


 "큰일 났어. 목에 가시가 걸리면 급성 종격동염이 올 수 있대. 치사율이 75%라는데? 지금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그녀가 구글에 검색을 해 본 모양이다. 코털을 뽑고 뇌수막염이 와서 사망한 사례도 있다는데 가시가 목에 걸려서 급성 종격동염이 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목에 가시가 걸렸다고 병원에 가는 건 내 사전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심지어 오늘은 일요일이다. 의원급 병원은 열지 않았을 테고 병원을 가야 한다면 대학병원 응급실이다.

 

 "안 되겠다. 응급실 다녀와야겠어."

 그녀는 카톡을 남기고 응급실로 출발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생선가게 집 장남으로서 생선을 먹을 때 필요한 몇 가지 팁을 주자면, 우선 물고기는 급하게 먹어선 안된다. 꼭꼭 씹으며 혀를 재빠르게 굴려 살과 가시를 지속적으로 감별해야 한다. 천천히 먹는 게 익숙해진다면, 자신의 주량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삼킬 수 있는 가시 크기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가시를 완벽하게 제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모든 가시를 발라내려고 하면 생선을 먹는 즐거움이 현저히 줄 수밖에 없다. 고로 삼켜야 할 때는 융통성 있게 삼켜줘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렇다면 삼킬 수 있는 가시 크기는 어디서,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간단하다. 많이 먹어보면 된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속담에서 고기는 생선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차 타러 지하주차장 내려가다가 좀 괜찮아져서 집에 다시 돌아왔어."

 참말로 다행이다. 역시 박대를 향한 신뢰는 틀리지 않았다. 별다른 치료 없이도 그녀의 증상에 차도가 있기 때문에 아마도 가시는 이미 빠진 게 아닐까 싶다. 이 상황이 더 기쁜 이유는 여자 친구가 응급실에 가지 않아서  공부할 시간을 아꼈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치를 '임상고정성보철학' 기말고사가 12시간도 남지 않았는데, 나야 이미 시험 대비가 되어 있지만 하루 종일 일하느라 바빴던 그녀는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런 상태에서 응급실 특유의 무한궤도 대기시간에 빠지는 순간 좋은 시험 성적과는 멀어졌을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남은 시간 열심히 공부하자는 다짐과 함께 일요일 밤이 저물어 갔다.




 월요일 오전 8시부터 1시간 동안 '임상고정성보철학'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오는 길에 여자 친구를 만나 목에 가시 걸렸던 것은 좀 어떠냐고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에 박대를 향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금 병원 가보려고. 이물감이 심해서 너무 불편해. 공부하는데 집중도 안되고."

 속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근처 가까운 이비인후과 의원이 어디 있는지 검색했다. 정말이지 순진해 보이던 박대 녀석이 내 최측근을 이토록 힘들게 만들지 몰랐다.  

 "찾았다. OOO 이비인후과! 7737번 버스를 타면 돼!"


 월요일 아침 일찍인데 벌써 병원이 북적북적하다. 하지만 대부분 코로나 백신 접종을 위해 내원한 사람들이기에 예상보다 빠르게 부원장님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치과에서는 이빨이 부러지거나 외상을 입은 환자들이 찾아오면 TPV를 (T: 언제, P: 어디서 V: 어떤 종류의 충격으로 외상을 받았는지) 필수적으로 기록해 놔야 한다. 의과도 마찬가지인지 부원장님께서 여자 친구에게 자세한 질문을 던지신다.  

 "어떤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리셨다고요?"

 "박대요!"

 "박대... 요?"

 박대 홍보가 더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끼던 중, 그녀의 입 안으로 내시경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화면에 그녀의 기분과 시험을 망친 원흉이 보인다. 가시는 현재 성문(glottis) 위에 박혀있다. 부원장님은 한참을 고민하시다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신다.

 "현재 이 병원에는 이렇게 깊숙한 곳에 박힌 가시를 뺄 수 있는 기구가 없습니다. 원장님께 다시 진료받아보시거나, 대학병원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미안한 마음이 커지기 시작했다. 심각한 줄도 모르고 나도 많이 걸려봐서 잘 안다느니, 암시랑치 않다느니, 당장이라도 무릎 꿇고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나까지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녀의 불안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애써 태연한 척 원장님을 믿어보자고 격려하며 원장실로 들어간다. 연혁에 '하버드 의과대학 교환 교수를 2년'이라는 보기만 해도 신뢰 가는 문구가 떡하니 적혀있다. 이 분은 뭔가 다를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든다.

 

 "포셉(forcep)이 좀 짧을 것 같지만 한번 해보죠. 구역질 날 수 있으니 마취부터 하겠습니다."

 시작됐다. 긴 포셉이 내시경과 함께 여자 친구 입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포셉이 가시에 닿질 못하고 있다. 이비인후과도 치과와 마찬가지로 결국 도구 빨인가? 그녀는 목 안에 큰 쇳덩어리가 들어가니 헛구역질 중이고, 원장님은 가시가 잡히지 않아 땀을 뻘뻘 흘리신다. 이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는 나는 아주 죽을 맛이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원장님은 결국 포기하시고 만다. 가시가 너무 깊은 위치에 박혀 대학병원에 가서 더 긴 포셉을 이용해 뽑아야 한다고 설명해주시며 진료의뢰서를 써주신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원장실에서 나오려던 순간, 원장님은 임팩트 있는 말씀 하나를 남기신다.

 "구역 반사가(칫솔을 깁게 넣으면 자연스럽게 헛구역질이 나는 현상) 남들보다 심하신 편입니다. 대학병원에서도 헛구역질이 계속되면 수면마취를 하고 가시를 뽑아야 할 수도 있어요."

 이 무시무시한 통보를 듣기 전에, 분위기를 쇄신하려 여자 친구에게 박대가 미국에서 온 생선이 아니어서 하버드 출신 원장님도 뽑지 못하신 거라는 농담을 던지려 했다. 하지만 수면마취라는 단어까지 들은 이 상황에서 그런 농담을 던졌다가는 병원 창 밖으로 던져질 수도 있기에 꾹 참는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게  박대 가시다.


 대학병원 이비인후과에 외래 진료 접수를 하고 대기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직접 이런 일을 경험해보니 돌고 돌아 대학병원이라는 말이 딱 맞다. 가끔 치과대학 병원에 방문하시는 환자분들도 이곳저곳 많이 떠돌다가 결국 대학병원까지 흘러왔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런 환자분들의 절박한 심정이 이해 가는 순간이다.

 여자 친구 이름이 안내 데스크에서 호명되고, 비장한 마음으로 진료실에 들어간다. 그녀와 레지던트 선생님은 질문 몇 가지를 주고받는다. 역시나 방금 들렸던 OOO 이비인후과와 마찬가지로 박대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본 눈치다. 박대가 유명하고 유명하지 않고 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당장 여자 친구 목에 박힌 가시나 좀 뺐으면 싶다.

 전보다 확연히 더 긴 포셉이 내시경과 함께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때 레지던트 선생님이 알려주신 팁은 고음을 내는 것이다. 고음을 내야 성대가 가늘어지고, 주위 주름이 펴져 시야 확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그녀가 고음을 내는 동안에 가시를 빼야 한다는 소리다. 가장 먼저 온 1년 차 레지던트 선생님이 이리저리 시도해보시더니, 곧바로 다른 2년 차 레지던트 선생님을 호출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2년 차 선생님까지 연달아 실패하고 만다. 몇 분 만에 두 명의 레지던트가 박대에게 백기를 들었다. 저년차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마주 보고 상의를 하신다.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결국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잠시 후 수려한 외모를 지니신 고년차 레지던트 선생님 한분이 크록스를 바닥에 끌며 다가오신다. 간단하게 앞선 상황 설명을 들으시더니 거침없이 라텍스 장갑을 끼신다. 고수의 향기가 난다. 이제는 정말 끝내야 한다.

 

 대략 열다섯 번째로 내시경과 포셉이 여자 친구 입 안으로 들어간다. 그녀도 이번이 정신 또렷이 깨있는 상태에서 가시를 뽑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아는지, 있는 힘껏 고음을 낸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수면마취다. 포셉이 바쁘게 움직인다. 그녀는 숨이 차는지 점점 소리가 약해지고, 결국 소리가 멈추고 만다.

 '이번에도 실패인가?'

 고개를 떨군다. 그도 그럴 것이 수면마취 상태에서 가시를 빼는 시술은 오늘 못한다. 수면 마취를 하려면 6~8시간 금식을 해야 하기에 새로운 날짜로 시술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환자가 많은 대학병원 특성상 다음 내원 날짜가 언제 잡힐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그녀는 목에 가시가 걸린 체 기약 없이 시술 날짜를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다. 당장 이번 주 내내 시험인데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어랏? 근데 뭔가 이상하다. 아직 포셉이 목 안에 있다. 모두가 놓친 물고기라고 이만 낚싯대를 올리라고 할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강태공의 모습이다.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다. 잠시 후 포셉이 입안에서 무 뽑히듯 쑤욱 빠져나온다. 끝에 1cm 도 되는 박대 가시와 함께. 여자 친구를 꽉 안아준다.  

 '아버지 죄송해요. 저희는 당분간 육고기만 먹겠습니다'




 박대 가시 해프닝이 있고 난 2주 후, 기말고사 성적 확인 기간이 됐다. 이번만큼은 유독 긴장감이 돈다. 여자 친구는 치과대학 4년 동안 항상 좋은 성적을 받아왔지만 이번 월요일 시험인 '임상고정성보철학' 시험만큼은 예외일 것이다. 우선 경향성 파악을 위해 몰래 내 성적부터 확인해본다. 확인 결과 나름 준수한 성적을 받았다. 이제 옆에 있는 여자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운을 띄운다.   

 "나는 '임상고정성보철학' BO 나왔다! 성적 짜게 주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데?"

 행여나 가시 때문에 평소 나오던 성적보다 한참 떨어지진 않았을까 조심스럽다. 그녀는 아직 성적 확인을 하지 않았는지 핸드폰을 손에 들어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직 확인 못했는데 지금 봐야겠다!"

 두근두근하다. 시험 성적은 전날 막판 쪼이기로 결정 나는 데, 일요일 밤에 가시 때문에 그 고생을 했으니 학점이 평소보다는 떨어졌을게 분명하다. 어떻게 위로해야 하나, 꽉 안아줘야 하나 고민이 깊어진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이리저리 만지던 그녀는 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불안하다. '많이 안 좋은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성적인가?' '괜히 먼저 B0 성적을 받았다고 말했나.'

  

 "나는 A0네!"

 

 o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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