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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멘달 Jul 12. 2022

나 혼자만 몰랐던 깊은 슬픔

그 우아한 발걸음을 두고두고 기억합니다.

  10월 12일은 시어머님의 기일이다. 어느새 15주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2009년, 우리 부부는 네덜란드에서 함께 유학 중이었다. 결혼 6년 차임에도 각자 학업 부담감에 2세 계획은 뒷전이던 나날들이었다.

그해 어느 가을, 남편은 학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으로 떠났고 남편이 떠난 지 며칠 후 나는 임신 테스트기에 나타난 선명한 두 줄을 확인했다. 석사 학기가  막 시작된 때였다. 남편도 옆에 없으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대던 나는 결국 한국에 계신 친정 엄마에게 이 소식을 털어놓았다.

엄마는 남편이 네덜란드로 돌아올 때까지 히다렸다 함께 병원에 간 후 임신 사실이 확실해지면 시댁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엄마와 나는 남편에게도 이 사실을 당분간 비밀로 했다.


  한국에 간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렸다. 2주 계획으로 떠났던 남편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늘어났다며  한국에 머무는 기간을 자꾸만 연장했고 결국 한 달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남편이 없는 동안 임산부가 되어 홀로 입덧까지 겪고 있던 나는 원망 아닌 원망으로 ‘돌아오기만 해 봐라’ 내심 벼르고 있었다.


  남편이 도착하기로 한 날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에게 임신 소식까지 전할 생각에 오랜만의 재회가 더 설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남편에게 그동안의 설움과 원망도 시원하게 쏟아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게이트를 통해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나오는 그의 얼굴은 내 남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란 말에 남편은 “그냥~덥고 바빴어.” 라며 얼버무리기만 했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남편은 별 말이 없었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서프라이즈 선물로 남편에게 임신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가빠 날뛸 줄 알았던 남편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보라야.. 놀라지 말고 들어. 놀라면 아기도 놀란대. 알았지? 우리 엄마 돌아가셨어.. 흐.. 흑.. 아무래도 우리 아기는 엄마가 우리에게 주고 가신 선물인 것 같아”


  하늘이 노래진다는 것이 이런 거였나. 왜? 건강하셨던 어머님이? 믿을 수가 없었다. 석 달 전 한국에 갔을 때만 해도 찜질방에서 가난한 외국 유학생활이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나를 다독여 주시던 어머님이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던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나만 몰랐던 그 한 달 동안의 모든 일들이 어머님과 가족들에게 너무 죄송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가셨던 어머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고 하필 여행지가 섬이었던 터라 병원까지 이송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었다고 했다.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서 삼일을 버티셨고 그 시간 동안 모든 가족과 친구분들이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다녀가셨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전 남편은 어머님 귀에 대고 “엄마, 보라는 못 와. 보라가 임신을 해서 비행기를 못 탄대. 엄마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간 아기 잘 키울게. 걱정 말고 편히 가세요”라고 전했고 다음 날 새벽 어머님은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고 했다.


  남편이 어머님의 사고 소식을 장인 장모님께 전했을 때 내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고 온 가족이 고심한 끝에 나에게는 당분간 알리지 않고 어머님의 장례까지 치르는 걸로 결정했다고 했다. 모두의 배려 속에 나는 그저 온실 안의 화초처럼 아무것도 모른 체 임신 초기의 안락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어머님의 사고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한 남편과 가족 그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바다 건너에 있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떨리는 손으로 아버님께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붙든 체 우리는 말없이 서로 한참을 울기만 했다. 그동안의 슬픔과 떠나버리신 분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한 없는 죄송함이 교차하던 순간이었다. 아버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괜찮다고만 하셨다. 다 괜찮다고. 네 몸이나 잘 챙기라고.


  ‘우아한 유령’은 미국의 현대 작곡가인 윌리엄 볼콤이 돌아가신 그의 아버님을 추모하며 만든 곡이다. 작년 어머님의 추모 예배에 가기 전 생전에 가톨릭 신자셨던 어머님을 기억해 보라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추모 꽃바구니를 만들었다.(가톨릭에서는 보라색이 깊은 슬픔을 의미한다고 한다.) 우아한 슬픔이 느껴지는 꽃바구니는 내게 미국의 현대 작곡가인 윌리엄 볼콤이 돌아가신 그의 아버님을 추모하며 만든 곡 ‘우아한 유령’을 떠오르게 했다.


  어머님께 가던 길, 우리 가족은 잠시 바닷가에 들렀다. 들고 있던 꽃바구니의 꽃들이 바닷바람에 흔들렸다. 슬프지만 기꺼이 이 세상을 미련 없이 떠나는 어머님의 우아한 발걸음이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부디 그곳에서는 편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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