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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멘달 Sep 21. 2024

2285호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그곳

  운전을 좋아하지만 생각해 보면 '차'라는 공간을 더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곳에 가야 할 일이 많은 프리랜서 강사일을 업으로 하는 나는 운전을 좋아해서 늘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곳에 강의를 하러 가는 날에는 늘 같은 루틴이 반복된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늘 차에 두고 있는 편안한 신발로 갈아 신는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시간과 경로를 확인한 후 커피와 물을 가득 담은  텀블러를 홀더에 꽂는다. 그리고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선택한 음악과 함께 천천히 액셀을 밟아나가는 기분은 마치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가듯 늘 설렌다.


 사방으로 막힌 이 작은 공간에 나는 혼자이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말을 할 필요도 없는 이 고요의 시간은 늘 나를 살아 숨 쉬게 한다. 가끔은 고해성사라도 하듯 제일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말 못 할 이야기들을 꺼내놓기도 한다. 마음속 응어리들을 실컷 쏟아내 버리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나는 마치 새 사람이 된 듯 가뿐하기까지 하다.

  

 어제는 이렇게 소풍을 가듯 강의 장소에 잘 도착해서는 그만 차를 박고 말았다. 아차 하는 순간 내 차는 물론이고 상대방 차에도 커다란 흠집을 내었다.


 좁은 골목길, 오르막 끝에 위치한 종로구 가족센터는 갈 때마다 주차 문제로 늘 조마조마했다. 그날은 추석 연휴 전이라 길이 많이 막혔고 강의 시작 전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던 터라 마음이 급했다. 주차에 재주가 없어 긴가민가한 주차 스폿은 늘 스킵하던 때와 달리 급한 마음은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딱 하나 남은 좁은 공간에 조심스럽게 내 차의 엉덩이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파른 오르막길 위에서 액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는 내 발의 감각은 허둥대기 시작했고 그러다 그만 쿵! 앞에 주차되어 있던 남의 차를 기어이 박고야 말았다.


 차주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를 하고 보험회사에 사고 접수를 하느라 강의는 이십 분이나 늦고 말았다. 담당자 선생님은 협소한 주차 공간에 대해 오히려 더 미안해하셨지만 나는 여전히 식은땀이 흐른 채, 무슨 정신으로 강의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났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강의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역시나 목소리가 싸늘하다. 하지만 상습범인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오늘 내가 받은 강의료와 차를 수리하는 데 드는 비용을 비교하게 되자 오늘 나는 대체 무엇을 한 걸까.. 자괴감에 빠져 집에 돌아와서도 우울했다.


 한밤중에 주차장에 내려가 차를 다시 잘 살펴보니 찌그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도색만 하면 될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조용히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등받이를 한 껏 뒤로 젖혔다. 그제야 오늘 하루 긴장했던 나의 근육들이 아우성치듯 온몸이 욱신거렸다. 고요한 그곳에서 늘 그렇듯 내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해 보면 차는 내게 이동할 때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나는 늘 그대로 십분 쯤 더 머물다 들어가곤 했다. 집에는 마치 어미새를 기다리는 아기새들처럼 배고프다고 울부짖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정신없는 육아 전쟁을 시작하기 전 워밍업을 하는 것처럼 나는 답장해야 할 문자, 카톡등을 챙기거나 듣다 만 음악을 마저 들으며 잠시 숨을 고르곤 했다.


 남편과 다투고 홧김에 집을 나왔던 어느 날에도, 육아에 지쳐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잠시 혼자 있고 싶었던 날에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던 분노로 씩씩대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길이 없어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었던 날에도 나는 늘 아파트 주차장 한 곳에 세워둔 2285호, 나만의  비밀스러운 그곳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 문을 닫으면 바깥으로부터 소음이 차단되듯 그곳에서 나는 늘 시끄러운 마음의 소리로부터 격리되고 보호받을 수 있었다.


 나는 드뷔시의 '달빛'을 들으며 흐트러진 감정을 다독였다. 운전을 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큰 사고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었다고. 음악이 끝나고 나니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용기가 조금은 생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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