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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멘달 Apr 04. 2023

빈 틈을 보이는 엄마를 꿈꾸며

중학생 아이와 날마다 화해하기

  지난 화요일 저녁이었다. 학원 수업에 보충 수업까지 마치고 온 아이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귀가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제 방으로 가 들어가 문을 쾅 닫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시험을 망쳤나? 친구들과 싸웠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차피 지금 들어가 봤자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하므로 나는 아이가 조금 더 울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윽고 울다 지친 아이는 퉁퉁 부은 눈으로 문을 빼꼼히 열고는 “엄마 이리 들어와 봐”라고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저 방에 들어가 아이가 쏟아내는 투정을 무조건 받아주어야 한다. 자, 내 감정 따위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던져버리자. 후~깊은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엄마, 나 내일 학교에서 하는 건강검진이 너무 걱정돼. 비만이 의심되는 친구들은 피를 뽑아야 한다는데 우리 반에서 나만 뚱뚱하단 말이야! 나 내일 학교 결석하고 싶어! “


  오 마이 갓. 이것은 내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간 악몽에 시달려온 이슈가 아닌가. 내 딸이 나와 똑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다니 참담했다. 나는 ‘그냥 눈 딱 감고 해. 그러게 엄마가 작작 좀 먹으랬지!’라는 말을 꿀떡 삼키며 ”괜찮아, 사람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 일에 별로 신경 안 써. 그리고 엄마도 옛날엔 뚱뚱했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크면 날씬해질 거야. “ 라며 최대한의 다정함을 끌어올려 말했다.


  하지만 아이는 오히려 더 기분 나쁜 듯 “엄마 닮아 내가 뚱뚱한 거잖아! 다 엄마 때문이야!!” 라며 쏘아붙였다. 화살은 나한테 돌아오고 말았다. 그날 밤, 끝도 없는 말씨름이 오가고 나는 기가 다 빨린 채로 지쳐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마치 밤새도록 쉬지 않고 꿈을 꾼 듯 피곤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큰 아이의 최대 관심사는 외모와 연애다. 남자 친구를 사귀고 알콩달콩 데이트를 해보고 싶단다. 학원에 갈 때마다 옷을 수십 번 갈아입는 게 수상하다 싶었는데 어느 날 아이는 울먹이며 내게 하소연을 했다. 친구와 카톡을(그놈의 카톡!) 주고받았는데 내용인즉, 학원에 나름 자신과 썸을 타던 남자아이가 알고 보니 다른 여자애랑(그것도 아이의 친구) 사귀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했다. 아이는 좌절해서 자기가 뚱뚱하고 못생겨서 그런 거라며 훌쩍였다.


  공감하고 위로해 주는 거에 늘 서툰 나는 “무슨 남자 친구야! 엄마 때는 날라리들이나 중 고등학교 때 연애했었어!”라고 말했다가 ‘꼰대’라는 소리만 들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남편에게 SOS를 쳤다. 하지만 ”나중에 대학 가면 더 멋진 남자 만날 거야 “라는 남편의 올드한 충고는  딸을 더 격분하게 만들었다.


  ”대학 갈 때까지 언제 기다리냐고! 나는 지금 만나고 싶다고!! 엄마, 아빠랑은 말이 안 통해!”


  나는 요즘 십 대 여자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이 제일 어렵다. 오늘은 같이 떡볶이를 먹으며 하하 호호했다가 내일은 좋아하는 연예인을 흉봤다며 이유로 인사도 안 하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우리 애 말로는 자기 빼고 다른 애들은 다 남자 친구가 있다는데 도대체 14살 아가들이 하는 연애는 뭐 어떤 건지 정말 궁금하다. 차라리 우리 애가 하루빨리 남자 친구가 생겨서 나의 이 궁금증을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젯밤 울다가 잠이 든 딸이 침대 위에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키득거리고 있다. 아침 먹으랬더니 콧노래를 부르며 묻는다. “아침 뭐야?” 이번에도 또 소심한 나만 심각해져서 잠을 설친 것이다. 아침을 차리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너는 그런 아이였지.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잘 먹고 잘 잤다. 체력이 좋아서인지 늘 활동적이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전형적인 에너자이저 형 어린이였다. 소심하고 정적인 나는 그런 아이를 따라다니느라 적잖이 힘들었지만 솔직히 나는 나와 전혀 다른 성격의 아이를 관찰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며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 그래서 감정 표현은 그 자리에서 다 쏟아 내지만 또 금방 털어내므로 뒤끝은 없는 아이. 이런 성격의 아이들은 보통 무리에서 앞장서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내 아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아기 때부터 아이는 그 또래 아이들의 사회의 장인 놀이터에서 자주 ‘대장’이 되곤 했다. 동네 엄마들은 종종 그런 내 아이의 모습을 보고 ”아이가 참 리더십이 있네요. “라고 말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도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늘 활발하고 적극적이었다. 학교 생활을 재미있어했으며 학습도 곧잘 했다.


  아이에게 크나큰 위기가 찾아온 것은 2019년 여름이었다. 그때 우리 가족은 남편의 안식년을 맞아 미국 뉴욕주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이타카에서 일 년 동안 거주하게 되었다. 큰아이 초등학교 3학년, 작은 아이는 7살이었다. 아이들은 한국에서 영어 사교육을 받지 않았던 터라 미국에서의 처음 2개월은 그야말로 벙어리와 다름없었다. 어딜 가든 나를 앞장 세워서는 “뭐래?”라는 질문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래도 스펀지처럼 아이들은 점점 언어를 빠르게 습득해 나갔고 어느새 나의 한국식 발음을 무시하는 때가 도래하고 말았다. 내 발음을 잘 못 알아듣는 미국인들에게 아이는 자랑스럽게 나 대신 말을 전달해 주며 이번에는 나를 벙어리로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아이들이 귀엽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했다.


  영어 알파벳과 어설프게 파닉스 정도만 알던 아이들은 각각 미국 공립 초등학교 1학년, 4학년에 들어갔다. 아이가 어릴수록 외국 생활에 적응이 빠를 거라고 충고했던 주변 사람들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학교 생활에 너무나도 빨리 적응했던 막내와 달리 4학년에 들어간 큰 아이는 그러지 못했다. 처음 학교에 가던 날,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신이 나서 노란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던 아이는 그 이후 학교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버스에서 내릴 때면 늘 시무룩(가끔은 울면서)한 표정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우리 아이는 어디를 던져놔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학습도 잘 따라가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던가! 사실 미국에 와서도 금방 적응해서 잘 다닐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아이는 그곳에서 내내 ‘아웃사이더’였다.


  “학교에 있으면 나는 바보가 된 것 같아요.” 의기소침하게 말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어 매일 새벽 스쿨버스에 태워 학교에 보냈다. 자존심이 강한 아이라 나름대로 학업에 뒤지지 않으려고 아이는 밤늦도록 우리 부부와 모든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 나갔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은 그런 아이를 보듬어 주셨지만 아이에게 친한 친구는 생기지 않았다.


  그 시절 아이는 난생처음 ‘위장병을 앓았으며 학교에서 자주 토했다. 아이가 또 토했으니 와서 데려가라는 학교 간호사의 전화를 수없이 받았다. 그때마다 차를 몰고 학교로 갈 때면 울지 않으려고 눈물을 꾹 참았지만 막상 양호실 옆 의자에 커다란 책가방과 함께 우두커니 앉아있던 내 아이의 모습을 보면 참았던 눈물이 봇물처럼 터지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새로운 경험을 아이들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던 내 마음이 결국 욕심이 되어 아이가 겪지 않아도 될 크나큰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남편에게 울면서 짐 싸서 한국에 돌아가자는 말을 밥먹듯이 했다. 그러던 중 미국에 온 지 7개월 만에 코로나로 인해 학교는 휴업을 했고 아이는 온라인으로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5개월 간의 외부와 차단된 답답한 생활은 우리 가족을 힘들게 했지만 아이는 더 이상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수는 있었다.


  1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아이는 다시 4학년 2학기를 시작했다. 여전히 코로나로 학교에 가는 날들은 적었지만 아이는 친구들과 통화하고 학원에 다니며 예전의 활발했던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엄마, 나는 한국이 제일 좋아.”라고 말했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 긴 시간과 돈을 투자해 미국이라는 먼 곳까지 가서 1년을 머물다 온 우리 부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머쓱해지곤 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종종 아이는 친구들과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선배 엄마들의 조언에 따르면 여자 아이들은 고학년이 될수록 친구 관계가 복잡해져서 별 것 아닌 일로 서로 등을 돌리기도 한다고 했다. 사실 그러면서 나와 맞는 친구를 찾아가고 인간관계를 배워가는 다 지나가는 과정일 테지만 나는 아이가 친구들과 문제가 생겨 속상해할 때마다 미국에서의 경험이 떠올라 겁부터 났다. 그리고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성급한 마음에 아이에게 먼저 사과하기를 종용했다. 아이는 처음에는 수긍하는 듯싶더니 이내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따져 물었다. “엄마는 대체 누구 편이야? 왜 내가 항상 먼저 사과를 해야 해? “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고학년이 되어 아이는 2년 동안 동네 핼러윈 파티를 주관했다. 친한 친구 몇 명과 초대장을 만들어 카톡으로 전달하고 파티 행사를 계획하며 준비했다. 심지어 동네 아이들 엄마까지 섭외해(나포함) 행사 당일 ‘트릭 오어 트릿‘을 외치며 방문하는 핼러윈 복장을 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아이를 잘 아는 그들은 기꺼이 아이의 제안을 받아들여주었다.  각자 개성대로 변장을 한 아이들은 5인 1조가 되어 어둑한 저녁 놀이터에서 출발해 동네 아파트 다섯 집을 돌았다.


  그날의 마지막 행사인 런닝맨 게임을 하기 위해 아이들은 다시 놀이터에 모였지만 게임 진행에 불만을 가진 몇 명의 친구들이 참여하지 않는 바람에 결국 마지막 행사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래도 사탕이 가득 담긴 핼러윈 바구니를 소중하게 안고 돌아서는 대부분 아이들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들어온 아이의 표정은 오묘했다. 자신이 주관한 행사가 어쨌든 잘 마쳤다는 안도감과 뿌듯함을 느낀 반면 완벽한 진행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불만이 있었던 것에 대한 아쉬움과 속상함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날 나는 수고한 아이에게 치킨을 시켜주었다.


  3월,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중학생인 된 큰 아이는 다행히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다. 초등학교에 비해 규율도 엄격하고 공부할 과목도 많아져서 아무래도 처음엔 낯설고 힘들어하겠지 싶었는데 아이는 모든 것들을 새롭고 신선한 경험으로 받아들이며 긴장감을 즐기는 눈치다.(아직까지는) 특히 매점을 들락거리는 재미와 교과목마다 달리 들어오는 선생님들의 다양한 매력에 아이는 신나 했다.


  회장이(요즘은 각 반의 반장을 회장이라 부른다) 된 아이는 며칠 전 1박 2일 임원수련회에 다녀왔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련회를 가본 경험이 없는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하룻밤을 잘 보낼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다음 날, 집에 돌아온 아이는 오늘 새벽 6시에 기상해 남산에 올랐는데 너무 힘들었다며 투덜댔지만 이내 지난밤 친구, 선배들과 벌였던 열띤 토론의 분위기와 밤 12시가 넘도록 방 친구들과 베개싸움을 하며 놀았던 일 그리고 선생님들의 깜짝 치킨 야식 선물까지 끝도 없는 이야기보따리를 신이 나서 풀어놓았다.


  아이는 지금 배워가는 중이다. 세상에 모든 것에 내가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앞에 나서서 주목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도 따른다는 것을.


  ‘아이는 부모의 빈 틈에서 자란다.’ 최근에 읽은 책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_심윤경>에서 나오던 한 구절이다. 늘 일하는 엄마로서 나의 부재가 내 아이들에게 ‘빈 틈’이 되지는 않을까 불편한 마음이었다.


  이제 나는 아이에게 오히려 그 빈 틈을 내어 주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아이의 일과 나의 일을 분리해서 바라보고 싶다. 아이가 겪는 아픔과 고민에 최대한 귀 기울여주고 공감해 주되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만이라고 선을 긋고 싶다. 나와 다른 아이의 성향을 존중하며 내가 내어준 빈 틈 속에서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는 것. 나도 역시 배워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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