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멘달, 클래식 음악과 함께 하는 꽃꽂이
오늘 아침에는 가라앉은 날씨만큼이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자꾸만 가라앉는 컨디션을 어쩌지 못해 도로 침대에 누웠다. 10분쯤 지났을까. 설핏 잠이 들었던 것도 같은데 난데없이 날아온 카톡 소리에 잠은 이내 달아나버렸다.
‘고객님의 대출상환 납입일은 2023.5.2 납부하실 금액은….‘ 은행에서 보낸 달갑지 않은 문자였다.
작년 3월, 작업실을 확장 이전 하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고 일 년 무이자 기간이 끝났으니 올해부터는 꼼짝없이 갚아 나가야만 한다. 정신이 번쩍 들었고 어두운 하늘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하는 꽃꽂이 클래스’를 운영하는 나는 간이 사업자다. 매 달 일이 많든 적든 월세는 꼬박꼬박 내야 하고 이제는 대출금까지 갚아 나가야 한다. 내가 이러고 누워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떡 일어나 샤워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뭐부터 해야 하지? 피식 웃음이 났다. 오늘은 일이 없는 날 아닌가. 내일부터 시작될 스케줄을 위해 오늘은 하루 쉬면 될 것을. 괜한 카톡에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때를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두 아이를 낳고 키우기 전까지 나는 콘트라베이스 클래식 음악 연주자였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를 두 번 반복하고 나자 나의 삼십 대는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버렸고 사십 대가 되어서야 아이들은 잠시나마 내 손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연주자로 돌아가기에는 나는 너무 먼 길을 걸어온 것 같았다. 아이들이 각자 유치원과 학교로 가고 나면 갑자기 주어진 자유 시간에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던 길, 동네에 새로 생긴 꽃집이 눈에 띄었다. '꽃꽂이 클래스 모집 광고‘ 꽃꽂이나 한 번 배워 볼까?
그렇게 시작된 꽃꽂이 수업은 무려 6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잠깐씩 사정이 생겨 쉬는 때도 있었지만 거의 매주 한 번씩 빠지지 않고 나는 꽃 수업을 이어 나갔고 어느새 꽃꽂이는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모든 배움이 그렇듯 꽃의 세계도 배우면 배울수록 끝이 없었다. 다양한 과정을 이수하며 점점 나에게 맞는, 내가 하고 싶은 꽃꽂이 분야를 찾아나가는 길은 늘 나를 설레게 했다.
꽃꽂이를 음악과 접목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꽃수업을 받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 미르테‘라는 꽃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다. 미르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작곡가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날 그녀에게 헌정한 가곡집 ‘미르테의 꽃’의 그 꽃 이름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검색해 보니 서양에서는 신부의 꽃이라 불리며 화관이나 부케에 많이 쓰인다고 한다. 그동안 수없이 연주하고 들었던 그 음악의 수수께끼를 마치 이제야 풀어낸 듯 나는 묘한 흥분감을 느꼈다.
그때부터였다. 수업 시간에 만나는 꽃들이 모두 음악과 연관 지어 떠오르게 된 것은. 봄에 만나는 라일락은 내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품곡 ‘라일락’을 떠오르게 한다. 그가 미국에서 오랜 망명 생활로 힘든 시절을 보낼 때 그리운 고향집에 있던 라일락을 떠올리며 작곡한 아름답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곡이다.
또 여름의 끝자락에 만나는 해바라기는 ‘일편단심, 기다림’이라는 슬픈 꽃말과 함께 독일 작곡가 브람스를 떠오르게 한다. 스승의 아내인 클라라를 평생 사랑하고 헌신했지만 결국 이루어질 수 없었던 슬픈 사랑의 주인공 브람스는 해바라기를 닮았다.
클래식 음악은 수많은 연결 고리를 가지고 꽃과 이어져 나에게 많은 스토리를 선물해 주었다. 내 머릿속에는 마치 마르지 않는 샘처럼 음악과 꽃의 이야기가 쉼 없이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이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매주 꽃수업을 받을 때마다 어울리는 음악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봐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도 그 작업은 나를 설레게 했고 또 무언가를 하고 싶게 만들어 주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나 같은 소심녀에게도 저지를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블로그에 글을 서른 개쯤 올렸을 때 나는 내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내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공간을 얻었다. 블로그로 음악과 함께하는 꽃수업을 홍보하였고 다행히 사람들은 조금씩 문을 두드려 주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누군가도 좋아해 준다는 것만으로 나는 신이 났다. 돈을 번다는 건 그다음 생각할 일이었다. 월세 내고 재료 살 돈만 벌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살림과 육아를 병행하며 일을 한다는 건 체력적으로 분명 힘들었지만 나는 그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로부터 내 이름 석자로 불리며 내가 가진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은 분명 신나고 보람된 삶이었다.
가끔 아이들의 어린 시절 모습이 그리워 옛날 사진을 꺼내어 본다. 그 속에 있는 나는 분명 지금보다 젊은데 아이 키우느라 여유가 없던 삶의 고단함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있어 생기가 없어 보인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분명 주름살은 더 늘었지만 이제 내 얼굴에는 그때는 없었던 '생기'가 있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 하는 꽃꽂이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