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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넴의 글 Oct 06. 2021

인종차별, 다른 '피부색'이어도 '피의 색'은 같으므로

[칼럼] 할말,잇슈(issue)다! 세 번째 시간

*본 게시글의 원문은 문화예술 플랫폼 '아트인사이트'(artinsight)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원문 :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3270


 지난 14일(현지시각), 제63회 그래미 어워즈 기념 카드 제작을 담당했던 미국 카드회사 톱스(Topps)가 BTS(방탄소년단)를 폭력에 희생당한 동양인 집단으로 표현하면서 인종차별 논란이 제기된 데 이어 지난 16일(현지시각)에는 미국 조지아주(州) 애틀랜타 부근에서 아시아인을 겨냥한 연쇄 총격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 세계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SNS 상에서도 아시아인들에게 무차별적인 폭행과 욕설을 가하는 장면들이 담긴 영상들이 공유되는 등 지난해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과 공분을 샀던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 사건에 이어 아시아인을 향한 인종차별과 ‘증오 범죄’(hate crime)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출처 : 머니S 뉴스)

                                                          

 인종차별에 대한 논의는 그동안 미국의 노예제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책, 독일 나치당의 ‘홀로코스트’(Holocaust) 사건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슬픈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특히, 20세기 이후 민족, 국가, 이념, 혈통 등을 둘러싼 ‘경쟁’을 강조했던 거대 담론들 대신 다양성과 상대성을 중심으로 전 지구적 차원의 ‘공존’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면서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타자성’을 중심으로 그 힘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모더니즘’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과 ‘반성’을 바탕으로 새로움을 좇고자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움직임은 곧 차별과 혐오에 대한 논의에 있어 과연 ‘정답’이 있는 것인지, ‘정해진’ 정답이 있는 것인지,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적’ 문제의식을 제기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주었고 그 결과, 인종차별을 비롯해 차별과 배제, 혐오 등에 대한 논의는 하나의 사회적, 공공적 담론으로서 꽃 피울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에드워드 W. 사이드(Edward Wadie Said)가 1978년 자신의 저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통해 보여준 통찰력은 단연 주목할 만하다. 아랍계 이름(Said)과 영어식 이름(Edward)이 ‘혼재’되어있는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복잡한 국가적·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이드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차별을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간 끝에 그는 그간의 경험을 발판 삼아 서구 중심주의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의되어버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과 그 뒤에 숨겨져 있던 일련의 동적(動的) 과정들을 파헤치려는 학문적 열정에 불을 지필 수 있었다.


<오리엔탈리즘의 범위>, <오리엔탈리즘의 구성과 재구성>, <오늘의 오리엔탈리즘> 총 3 부분으로 구성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사이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 특히, 상대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며 동양-서양의 ‘문화적’,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이어나갔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중반 식민제국주의의 종말 이후에도 서구 사회는 자신들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동양의 세계관에 ‘수동적’, ‘나약함’, ‘감정적’, ‘여성적’ 등의 이미지를 부여하는 등 동양을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써 이용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써 만들어진 ‘동양<서양’이라는 권력 구도가 ‘은밀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출처 : amazon)


 이처럼, ‘도전적’이고 ‘혁신적’ 성격이 짙었던 사이드의 논의는 이전까지 서구 중심주의에 완전하게 젖어있었던 당대 학계는 물론, ‘무지’라는 이름으로 ‘암묵적 동의’를 건넸던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구 중심주의 사고를 해체하고 그동안 철저하게 무시되어왔던 ‘타자성’을 확보하려는 포스트 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의 학문적 토양 역할을 수행했으며 무엇보다 그동안 은폐된 채 우리의 삶에 깊게 뿌리내렸던 차별과 혐오의 동학(dynamic)에 대한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차별과 혐오의 논의에 있어 필요한 ‘공동체 정신’, ‘성찰성’과 ‘실천적 사고’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이어나가고자 했던 사이드 역시 동양이라는 세계관 개념을 구성하는 데 있어 서양과 ‘근접하다고 판단되는’ 다시 말해, 어느 정도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는 아랍 지역만을 고려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적 논의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오랫동안 굳어져 있던 권력-지배 관계를 폭로하고 이를 도식화하려던 그의 시도가 오히려 그 대립 관계를 ‘정형화’하는 계기로 작용함으로써 오리엔탈리즘을 ‘숙명론적’으로 받아들이게끔 조장했다는 비판 또한 이어졌다. 


(출처 : ADL)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차별과 혐오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 난해한 ‘숙제’를 받은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차별과 혐오가 던진 ‘질문’에 대해 다시 한번 들여다봄으로써 그 질문 속에 ‘은밀하게’ 숨겨진 ‘의도’를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이에 필자는 차별과 혐오가 갖는 세 가지 특별한 ‘역동성’을 알아보고 이를 기반으로 인종차별 해소를 위한 하나의 ‘풀이 과정’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는 차별과 혐오가 다른 존재와의 비교 과정에서 발견한 단순한 ‘불일치’ 혹은 그로부터 비롯되는 ‘차이’에 대한 ‘왜곡된’ 사고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독일 철학자 카롤린 엠케(Carolin Emcke)가 <혐오 사회>(Gegen Den Hass)를 통해 보여준 논의는 주목할 만하다. 극단적 종교주의자, 성소수자, 난민, 여성, 유색인종 등 다양한 집단과 그들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차별과 혐오의 메커니즘을 분석하고자 했던 그녀는 자기 자신을 절대적 표준으로 생각하려는 ‘동질성’, 과거부터 이어져 왔던 만큼 앞으로도 그 기조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본연성’, 그리고 오로지 단일하고 깨끗한 사고만을 받아들이려는 ‘순수성’을 기반으로 차별과 배제가 하나의 메커니즘으로서 구성되고 작동한다고 보았다. 이는 곧 차별과 혐오는 곧 체계화 혹은 구조화라는 뚜렷한 ‘의도성’의 과정이나 그 결과물 없이도 그저 다른 ‘존재’ 가 아니라 다른 ‘대상’이라는 생각을, ‘다를 수 있음’이 아니라 ‘틀릴 수밖에 없음’을 내세우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출처 : THEOS think tank)

                                                    

 또한, 우리는 차별과 혐오가 이미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재화되어있음에도 자체적으로 ‘재생산’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부정성’(不定性)의 기제들을 ‘생산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특히, 차별과 혐오가 보여주는 ‘생산적’인 힘은 다른 존재에 대한 우리의 ‘가치 평가적’ 태도와 결부됨으로써 차별과 혐오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끔 만든다. 


 예를 들어, 당장 인터넷 커뮤니티만 보더라도 한국 사회에서는 ‘황인종’-‘비(非) 황인종’에 대해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두 범주 모두 우리와는 다르지만 저마다 특별한 ‘생득적’(生得的) 특징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황인종에 대해선 반감이 섞인 표현(‘~놈’,‘~년’)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며 그들을 ‘얕잡아’ 보는 반면 비(非) 황인종에 대해서는 존중(존경)이 담긴 언어 표현(‘~형’, ‘~누나’)을 통해 그들을 ‘우러러’ 보곤 한다. 이는 곧 차별과 혐오가 다른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시각을 이분법적으로 ‘단순화’시킴으로써 우리가 지켜야 할 ‘상대주의적’ 시각은 물론 차별과 혐오에 대한 비판적 판단력까지도 흐려지게 함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차별과 혐오가 사건·사고에서 의식으로, 다시 의식에서 사건·사고로 끊임없는 ‘재전유’를 반복한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를 차별과 혐오의 세계 속 하나의 ‘객체적’ 존재로서 묶어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다양한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인종차별의 문제는 우리의 일상 속에 깊게 박힌 채로 ‘언제든지’ 우리들을 괴롭힐 수 있는 그러나, ‘완벽하게’ 없애기 어려운 ‘가시’와도 같다. 


 예를 들어,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 의식 역시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도, ‘미국 사회’의 문제만도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서구의 대중문화 속에서 아시아인은 길게 찢어진 눈과 하얀 피부,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을 가진 이방인으로 조건화되어 있었을 뿐,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거시적 차원의 특수성은 물론이거니와 개개인만이 갖는 개성과 같은 미시적 차원의 특수성 역시 무시된 지 오래였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는 차별과 혐오는 분명 하나의 의식적 기제일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하나의 운동적 기제라는 점에 대해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차별과 혐오에 대한 인식이 곧 그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 및 행동에 있어 ‘적극성’의 차이를 가져온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상대성과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를 하나의 담론으로서 ‘확장’될 수 있게끔 ‘상호 교차’와 ‘정치화’의 과정을 꾸준하게 시도하려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  


 일례로, 지난 1960년대 중반부터 급진주의적 페미니즘의 한 부류로서 등장한 ‘블랙 페미니즘’(Black Feminism)은 차별과 혐오의 역사뿐만 아니라 차별과 혐오에 대한 논의가 가져야 할 ‘지향성’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페미니즘의 논의는 사실 지난 19세기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여성의 정치적 참여를 하나의 권리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시작된 이후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범 지구적 차원의 필수적 논의로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나날이 학문적 그리고 공공적 범위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지역(서구)·인종(백인)·사회적 지위(경제적 상류층)의 특수성에 제한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지난 1960년대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블랙 페미니즘’의 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성별’(여성)의 범주와 ‘인종’(흑인)의 범주 간 ‘상호 교차’의 과정을 통해 정립되기 시작한 ‘블랙 페미니즘’은 이후 ‘인종’의 범주에 대한 고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종족’·‘나이’ 등 보다 더 많은 종류의 ‘다양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체적으로도 정치화의 노력을 이어가는 한편 새로운 정치 영역들을 만들어가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출처 : Christine Abroad)

                                                      

 여기 ‘렛츠 오픈 아워 월드’(Let's Open Our World)라는 제목의 한 영상이 있다. 지난 2016년, 덴마크 여행사 ‘모몬도’(momondo)가 진행했던 프로젝트성 실험을 인터뷰 형식으로 풀어낸 이 영상은 67명의 다인종, 다국적을 가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DNA 검사 과정과 그에 대한 피실험자들의 반응을 다루고 있다. 영상 속 설명에 따르면, 피실험자들 대부분은 실험에 참여하기 전부터 자신들의 ‘국적’ 혹은 ‘출생국’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특정 국가에 대한 주관적 감정을 표할 만큼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강한 신뢰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검사 결과가 그들이 ‘단일하지도 않은’, ‘완전하지도 않은’ 국가나 민족에서 비롯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저 ‘다른 듯 닮고, 닮은 듯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자 피실험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당황하는 몇몇 사람들, 결과를 부정하는 몇몇 사람들, 그리고 그 가운데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실험에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긴 한 피실험자를 보여주며 영상은 끝이 난다.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어떤 하나의 존재로서 완전할 수 있고 완벽할 수 있는가? 이번 글이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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