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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blimer Nov 29. 2022

02 심술꾸러기들의 세상

2022.11.29.


| 26장을 1장에 담으면


그래 그럴 수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 그래서 그래 버렸다. 판매하는 서비스가 많다 보니, 혼동이 되어 가뜩이나 값이 저렴한 내 시간을 더 저렴하게 판매해버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잘못 판매했으니 내 시간에 값어치를 더 쳐달라고 말하기에는 구차하여, 눈물을 머금고 26장 학술논문을 혼을 담아 5장에 요약해야 한다. 차라리 1장이라면 쉬운 것을... 5장이라는 분량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문제는 요약 원고가 정식 발매된 책이 아니라 대학원생들이 분량을 나누어 나름 해석한 번역본을 합본하여 만든 원고라는 사실이었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한국말로 된 것이라면, 나는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해야만 했다. 심지어 나는 칸트로 논문을 쓴 사람이 아닌가? 이 글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칸트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도 어떻게든 읽어냈던 내가, 원고 첫 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마치 풀리지 않은 수학 문제 앞에서 시험 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씨름하고 있는 요령 없는 수험생처럼.







" 신 존재 증명


덕분에 나의 Crazy Day는 오늘 액셀레이터를 밟아버렸다. 하필이면 선배와 오늘 점심 약속이 있었고, 하필이면 인근에 사무실에 있던 다른 선배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등장하는 기이한 현상으로 인해 오늘 점심시간은 5시까지 연장되었다. 대화 중에도 계속 울리는 '띵동' 소리에 내 가슴은 타들어갔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에는 나만 바라보면서 골탕 먹일 기회를 엿보는 짓궂은 신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래 그랬다. 그 당시의 나는 독일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학에 관한 꽤나 훌륭한 책이었지만,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심지어 이렇게 개떡같이 번역한 번역가가 누구인지 검색까지 했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내 개인 블로그에 번역가에 대한 욕을 잔뜩 써놓았었다. 그때의 용감했던 나는 독일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동반되는 특유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인 헤겔은 지독한 만연체를 구사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방대한 저작을 지닌 데다가, 난해하기까지 했던 헤겔. 그의 만년의 얼굴을 보면서 사람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이 바로 '철학 그 자체인 얼굴'이다. 그랬던 그가 마침표를 찍지 않고 문장을 1페이지가 넘어가도록 끌고 갔던 이유는 "내가 어렵게 깨달은 진리를 누군가가 쉽게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라나...  아주 예전에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이야기라 실제로 헤겔이 했던 말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어쨌거나 그 이후 독일어 번역본인 책들에게서 비슷한 향기가 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나의 무지를 반성한 적이 있었다. 






| 헤겔의 향기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 번역본 원고는 무엇이냐? 설마 당신 헤겔 씨???






리처드 플로리다의 『000 0000』내용 정리 원고 

유튜브 드라마 <                 > 리뷰 시나리오 원고

중국 전통 예술을 MZ세대에게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 원고

게임 컨설팅에 관한 PDF 책자 첨삭 교열 작업

다큐멘터리 <                           > 서평 원고






난 요즘. 나 자신이 무서워. 

이러다가 네이버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아. 


그래도 나는 써내야 한다.

왜냐하면.



아련하다 아련해... 마감이 손에 잡히질 않아... 젠장... 



나는 프.리.랜.서.니까...








#프리랜서일기, #오늘의작업,#crazydays,#프리랜서작가,#나의하루는29시간,#오늘도자긴틀렸어,#먼저가난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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