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라(Shimla), India
델리-아그라-자이푸르 트라이앵글 지역의 여행을 마쳤다. 잠시 델리로 되돌아 와서 다음 여행 경로를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 찬디가르(Chandigarh), 다람살라(Dharamshala), 밤하늘에 별이 쏟아진다는 카슈미르 지역 등을 고려해보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꽤나 한적해 보이는 도시인 심라(Shimla)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심라는 인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인도가 영국령이었던 당시에는 휴양지로 각광을 받았던 도시이다. 여름철이 되면 콜카타의 수도 기능이 잠시 이곳 심라로 이전되었었다고 한다. 계절에 따라 수도가 이곳 저곳으로 움직인다는 개념은 현대인들에게는 낯설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깔끔병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비행기에서 얻어온 항공담요와 가벼운 소재의 침대커버를 휴대하고 있었다. 가급적 누구인지도 모를 여행자들이 덮었던 이불을 덮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인도에는 여름만 있다고 생각했다. '인도'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머리 속에는 작열하는 태양과 사막이 떠올랐고, 그동안 여행했던 도시들은 실제로 그랬다. "심라가 휴양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인도인데 기후가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심라는 내 생각과는 정말 많이 달랐다. 첫날밤부터 추위가 혹독하게 몰려왔다. 누구인지도 모를 여행자들이 덮었던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올리지 않고서는 잠들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긴팔 옷에 점퍼까지 끼어입고 두꺼운 담요를 몇장이나 겹쳐서 덮어야 했다. 나의 깔끔병은 추위에 의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기 때문에 지역에 따른 기후의 차이가 크게 발생한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열대의 무더위만을 상상했던 나에게 갑자기 찾아온 겨울이었다. 인도에는 겨울이 있다. 그것도 차갑고 혹독한 겨울이 말이다.
심라는 깔끔한 느낌의 휴양도시였다. 산자락을 따라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고 길거리도 깨끗했다. 지난 열흘 간 여행했던 도시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인도였다. 우리나라도 도시마다의 특색이 있고 지역마다의 음식이 다르지만, 인도에서 경험은 한국 도시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말 독특했다. 이 도시와 저 도시의 차이가 너무나 커서 같은 나라 안에 존재하는 두 도시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도시마다의 특색이 짙다. 그래서 나는 '인도 여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도를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어떤 도시를 여행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인도에는 n개의 도시가 존재하고, n개의 도시 여행이 존재할 뿐, 인도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내 생각은 그렇다.
심라에 도착한 즉시 이 도시는 냄새와 대기의 온도, 분위기가 델리나 아그라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심라의 중심가에는 인도에서 2번째로 오래된 교회인 크라이스트 처치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교회를 중심으로 도시의 방향감각을 짐작할 수 있다. 길게 늘어선 거리 자락으로 가게들이 줄지어 있고, 흥미로운 점은 각 가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른 시간에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인도의 어느 레스토랑에서나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맛볼 수 있긴 하지만, 북인도로 향할수록 티베트 요리를 잘하는 레스토랑이 많은 것 같았다. 티베트 임시정부가 위치해 있는 다람살라를 중심으로 티베트 음식도 가까운 거리 내에 있는 도시들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었으리라. 인도 여행 중에 내가 가장 즐겨 먹었던 음식 중 하나가 티베트 음식인 초면(chow mein)이었다. 심라에서 맛본 초면도 맛이 꽤나 훌륭했다. 초면은 볶음국수에 해당하는 요리로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비교적 잘 맞는다.
심라는 사실 볼거리가 많은 도시는 아니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한 휴양 도시이기 때문에 상점들과 음식점들이 줄을 지어 발달해 있을 뿐이었다. 이곳저곳 건물 구경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주변을 찾다가 몽키 템플을 방문하기로 했다.
하누만과 가네쉬(가네샤)는 원숭이 머리와 코끼리 머리를 가진 신들로 인도에서는 대중적인 인기를 가지고 있는 신들이다. 길을 걷다 보면 하누만과 가네쉬의 신상, 그림, 관련 상품들을 무수하게 발견할 수 있다. 가네샤는 시바의 아내인 여신 파르바티(Parvati)가 창조한 신으로 지혜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가네샤는 목욕 중에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파르바티의 명령을 수행한다. 그런데 그때 하필 시바가 아내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다. 시바는 자신이 시바신이며 파르바티의 남편임을 밝혔음에도 융통성 없이 자신의 앞길을 막는 가네쉬에게 화가 나서 부하들을 보냈지만, 가네쉬의 무력 앞에 패하고 만다. 결국 시바 자신이 직접 나서서 삼지창으로 가네쉬의 머리를 참수해버린다. 그런데 이 사실을 뒤늦게 안 파르바티가 화풀이로 온 세상을 멸망시키겠다고 나서자 사태가 급박해진다. 시바는 어쩔수 없이 사라진 가네쉬의 머리 대신 처음 만난 동물의 머리를 이용해 가네쉬를 다시 환생시키겠다고 파르바티를 달랜다. 시바가 처음 만난 동물이 코끼리였고, 이런 이유로 가네쉬는 코끼리 머리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하누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손오공의 원형이 되는 신이다. 자유자재로 몸 크기를 조정하고, 꼬리를 이용해서 빨리 움직일 수 있으며, 원하는 곳으로 바로 이동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신화에 의하면 산을 통째로 옮기기도 하고, 해협을 한걸음으로 뛰어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몽키 템플은 이런 하누만 신상이 서 있는 곳으로 실제로 수많은 원숭이 떼를 만날 수 있다. 소는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코끼리는 전쟁과 물자의 이동수단으로써 그 중요성을 가진다. 그래서 소와 코끼리가 여러 문화에서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이유는 문화적인 관점에서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원숭이는 소와 코끼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어디에도 쓸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신으로 추앙받는 것일까? 인간과 가장 유사한 외모를 지녔기 때문일까? 인간도 다른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데, 하물며 동물이 인간을 닮았다는 이유로 신으로 추앙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기묘한 인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아는 원숭이들은 대부분 동물원에 갇혀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야생에서 뛰어노는 원숭이들을 떼로 만날 수 있다. 도심 속을 살아가는 원숭이 들이라서인지 혹은 수많은 여행객들을 경험한 녀석들이라서인지 몰라도 이 원숭이들은 꽤나 거칠고 장난스럽다. 그래서 관광객들이 원숭이에게 안경이나 모자를 강탈당하는 일도 자주 발생한다. 갑자기 낚아채서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버리면 사실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특히 반짝이는 물건들을 좋아한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어떤 일에 대한 경고를 받아도 설마 어쩌다 일어나는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겠느냐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을 한다. 나도 한국 사람이었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설마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겠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났고, 원숭이들은 내가 아끼는 모자를 낚아채어 가지고 높은 나무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라에서 경험했던 인도의 겨울은 그렇게도 예상치 못하게 갑작스러웠고 매서웠다. 나는 인도에 대한 n개의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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