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이기적이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내 모습을 돌아보며.

by 미소


난 세상이 하얀색 도화지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었다.

나만의 도화지에 내가 그리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상상해 그려 놓고,

알록 달록 색깔을 입히기도 하고,

좀 아닌 것 같으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그리면서.

그렇게 하나 하나 나만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게 인생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생각하며 살지 않을까하는 어리석은 기대와 함께.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거나,

과도한 욕심을 부리거나,

나로 인해 누군가를 슬프게 하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무언가를 얻으려 한다거나.

그런 일들은 하지 않으면서 사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식이 통하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거라고 믿었다.

혹여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너무 순진한 나만의 생각이었다는 걸.

아니 어찌보면 답답하고 바보같은 생각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늘 하얗고, 푸른 색으로 가득했던 나의 기대가 아주 가까웠던 사람에 의해 칠흑같은 검은색으로 뒤덮인 후로.


너무도 가까웠기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숲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듬성 듬성 벌레먹은 잎들을 달고 있었지만,

봄이 오면 초록잎이 다시 돋아날거라는 기약없는 기대를 품은채, '그'라는 나무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라서 죽은 잎 위에 연둣빛, 초록빛 붓칠을 해 주다보면 언젠가는 그 빛깔로 변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지극히 이기적인 나만의 꿈이었고, 큰 오만이었다.

내가 색을 입힌다고 해서 살아날 수 없는 걸들이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내가 그려 나간 세상과 그가 그리고 싶은 세상은 전혀 달랐는데 말이다.


내 도화지 위에서 붓을 쥐고 있던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했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했던

지극히도 이기적인 사람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난 내 방식대로 그를 믿었고,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길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없다. 믿었던만큼, 가까웠던만큼 상처의 깊이는 더 깊이 스며들었다.


어디서부터 다시 붓을 들어야할지,

어떤 색을 어떻게 덧입혀야하는지,

무엇을 그려나가야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 마음조차도 나의 욕심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도화지 안에 열심히 그려 넣었던 그 동안의 내 세상을 차마 버리지 못한 채, 이미 끝난 그림 위에 덧칠을 해서 바꿔 보려고 했었던 것 같다.


상처로 얼룩진 그 도화지 위에는 이제 무엇을 그려 넣든 내가 원하는 색과 느낌은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 도화지를 꺼내서 그 위에 다시 그려 나가려 한다.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아주 천천히.


많은 걸 채우지 않아도 된다.

멋진 그림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나에게 오래 머물 수 있는 색으로 천천히 채우면서.


무엇보다, 다시 그려갈 이 그림에서는 이기적인 마음과 시선을 내려놓기로 하자.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멀리 바라보며.


망작이라 여겼던 것도 훗날에는 작품으로 남을 수 있기에 지금의 이 그림도 부정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앞으로의 그림은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채우지않고,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그려나가려 한다.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색을 품은 그림을,

우리 둘의 생각과 마음이 담긴 그런 그림을 함께 그려나가고 싶다. 같은 상처를 품은, 어쩌면 나보다도 더 큰 아픔을 느꼈을 아들과 함께 서로의 마음을 토닥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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