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피하지 않기로 했다.

지워 버리고 싶은 시간들 속에서 나를 위한 다정한 선택을 하기로.

by 미소


도화지에 그린 그림을 다시 백지로 돌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지우고 싶은, 아니 없애버리고 싶은 과거의 기억들도 내 삶의 일부이기에 더 이상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부정하지도 않고.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새롭게 나아가는 것이 나를 위한 가장 다정한 선택임을 안다.


그래서 더는 분노도, 후회도 붙잡지 않기로 했다.




며칠 전, 나와 그를 소개해 주신 분께 연락이 왔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까지는 한 달에 한 번씩 식사도 하고, 명절 때는 인사를 드리며 가족처럼 지내던 사이였었다. 더 이상 모임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씀드린 날, 한 걸음에 찾아오셔서는 안아주시며 같이 울어 주신 분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연락을 드리고 싶지도 않고, 받고 싶지도 않은 마음이 있었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다 끊어내고 싶은 마음때문에.


세 번째까지 받지 않다가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벨이 뭔가 애원하듯 느껴져 결국 전화를 받았다. 아무렇지않은 듯 전화를 받고 안부 인사를 건넨 순간, 사모님께서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너무 보고 싶었다며 말을 잇지 못하셨다.


2월에 연락을 준다고해서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어서 마음을 많이 졸이셨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연이 끝나버리는걸 아닐까 걱정되셨다고. 나쁜 사람은 그 사람일 뿐, 나와의 인연까지 놓고 싶지는 않다고 하셨다. 세번째 전화도 안받길래 너무 속상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시면서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한 번 더 전화를 거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 전화를 받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전하셨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집으로도 찾아왔었고, 사모님이 크게 꾸짖으셨다고 했다. 순간, 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다. 부모보다 낫다고.


남에게 싫은 소리, 싫은 내색 못 하시는 사부님은 그 이후에 두번 정도 만나셨는데, 만나려고 만난 건 아니고 곧 죽을 것처럼 문자를 보내서 걱정되는 마음에 만나셨다고 했다. 참 못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른들한테까지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는 것에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나 할까.


그렇게하지 않고서는 본인을 만나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모님께 그 말을 나는 오래 전부터 들었고, 심지어 아들한테까지도 그런 말을 한 사람이라고 그 말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제일 좋은 건, 관계를 끊어내는 거라고.


그랬더니 안그래도 딸들이 한 번 더 만나면 가족들한테 절교당할 줄 알으라고 엄포를 놓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모두 다 내 편이라는 말과 함께.




사모님은 처음부터 내가 너무 좋았고, 웃는 모습과 웃음 소리가 참 예뻤다며 너무너무 보고 싶다고 거듭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애써 눌러두었던 마음이 다시 일렁였다.


사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다시 들추고 싶지 않은 마음에 조금이라도 관련있는 것들에서 무조건 멀어지고 싶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나의 그 모습이 여전히 내 삶에서 그를 의식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피하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공통 분모에서 그를 지워내면 그만이니까. 그와 별개로 이어져 온 시간들과 앞으로 다시 쌓을 관계의 시간들을 이제는 담담하고도 담대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대로.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온전히 살아내기로 했다. 누군가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향한 시선으로. 그렇게 나의 삶을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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