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이는 나무가 아닌 휘어지는 갈대처럼.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경험이야말로 사람을 가장 깊이 흔들어 놓는 일인지 모른다. 또, 가장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오늘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치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취급될 때, 그 어떤 말보다도 잔인한 침묵이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미안함이라곤 전혀 없어보이는 그의 태도 앞에서.
오히려 나의 잘못을 들춰 내려하는 그의 행동 앞에서.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이 관계 속에 존재해 온 이유를 되물으며 많이 힘들었었다.
지나온 시간 속의 나의 모습을 들춰볼수록,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에 괴롭기도 하고, 그 생각의 끝에서 늘 마주하는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여전히 나를 그 자리에 멈추게 하곤 했다.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나를 지켜야하는지 알기에 그 생각에서 조금씩 벗어나고는 있지만, 불현듯 찾아오는 기억 앞에서 아직도 마음이 요동칠 때가 있긴 하다. 이 또한 다 지나가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의 크기만큼 기억되는 일이 아닐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이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얼마 전 부모님과의 마찰은 나를 다시 한 번 깊은 수렁에 빠지게 만들었다.
짐을 싸서 집에서 나왔을 때 돌아갈 곳이 있어서 감사했었고,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다 받아줄 것만 같았던 부모님이라 생각했었다.
평생을 남들 시선에 매여 살아오며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소홀한 듯 여겨질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의 부모이고, 바뀔 수 없기에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살아왔었다.
잘못된 건 바로 짚고 넘어가는 언니와는 달리 난 나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했고, 살피려고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래서 결국 탈이 난걸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난 솔직히 이혼을 결심한 것에 대해 그 어떤 후회도, 미련도 남아 있지 않다. 엄마, 아빠도 내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했고, 지금은 이혼이 흠도 아니라며 나의 선택을 지지해 주셨다. 겉으로 내뱉는 말로는.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들만 데리고 혼자 온 나를 보고 그의 존재를 물으면, 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렇게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었다. 부끄러울 게 뭐가 있냐고 내 생각이 맞다고 맞장구도 쳐주던 엄마도 그 상황을 마주하고 보니 마음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묻지도 않았고,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친척들에게 인사하려 들어가던 나를 잠시 세우더니 얘기안했으니 너도 내색하지말라며 손짓으로 입단속을 시키는 엄마.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제 다시 나 스스로를 세워 나가고 있었는데, 겨우 다시 쌓아올린 나의 당당함이, 나의 존재감이 또 다시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낯선 나의 모습을 보고 놀란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방으로 들어 온 엄마는 왜 그러냐며, 아직 정리가 안 됐으니 나중에 말하자는 것 뿐이었다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나도 더 이상 감정을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있는데 왜 숨겨야하는건지 모르겠다고. 그 새끼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인데 내가 왜 숨어야하냐고. 옆에 있던 언니도 애도 아니고 사십 넘은 딸 입단속 시키는 부모가 어디있냐며 한 마디를 보탰다.
난 차라리 잠시 나가있겠다고 말하고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와버렸다. 갈 곳은 만들면 되니까 당당하게 나와버렸다. 내가 거짓말하는 건 할 수 있지만, 아들에게까지 거짓말을 해야되는 상황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친척들이 다 가고 난 후 다시 집으로 들어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고, 여기에 있는 내가 불청객마냥 느껴졌다. 상황을 해결하려고 아빠가 와서 내게 건네는 말도 더이상 위로로 들리지않는다.
나에게 많이 힘드냐고 물어보면서 엄마도 상처를 많이 받았으니 이해하라는 말이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말라고했다. 서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달라서 생긴 일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거니까 그만 이야기하면 좋겠다며 마음에 없는 말을 막 꺼내놓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직 불안정한 내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마음이 문이 잘 열리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열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혼란이 마음 속에 풍랑처럼 밀려 왔고, 난 흔들리는 파도 속에서 배의 키를 잡고 내가 가야 할 방향을 다시 찾아야했다.
모든 걸 지켜 본 언니가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모든 걸 품어줘도 모자랄 상황에 이렇게 널 또 힘들게 해서. 언니가 미안해야할 일은 아니었지만, 언니는 나보다도 더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언니에게는 솔직하게 털어놨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그렇게 할 수도 있을거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으로서는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그냥 지금은 아들이랑 내 마음 추스리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나를 단련할 시련들은 왜 이렇게 한꺼번에 밀려오는 걸까. 잔잔바리보다 몰아치는 게 어쩌면 나은 걸까. 크게 한 번만 휘청이면 될테니까.
폭풍우에 꺾이는 나무말고, 휘어지는 갈대로 살아 가자. 아무리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잠시 눕는 것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