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이쁜 모습으로 헤어지고 싶어

by Lucia

딸래미와 남친은 고2때부터 커플이 되었다.

우려와는 달리 두 아이 모두 학교생활에 충실하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담임선생님은 성적을 걱정했는데 둘다 성적이 올랐다며 짝으로 앉혀주시기도 했다.

아이들은 백일,이백일,삼백일 챙겨가며 공부하는 틈틈이 같이 밥먹고 소소한 선물을 주고 받으며 나름대로의 추억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아이가 우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가 걱정할까봐 티를 안내려 하지만 티가 안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저 공부하는게 버겁고 힘들어서 우는건가 보다 했다.

고2 겨울방학 무렵, 느닷없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싶다고 한다.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일인가.

아무리 정신과 치료가 감기 치료처럼 보편화 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 아이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싶다고 하니 여간 심란한게 아니다.

어느새 병원까지 알아보고 예약을 해달라고 한다.

이정도면 뭔가 심각한 일이 아이한테 일어나고 있는건 아닐까 싶어 일단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예약을 위해 전화를 해보니, 당분간 예약이 꽉 차 있었고 청소년 진료는 당분간 안한다고 한다.

이유를 물었더니 성인환자가 너무 많아 청소년 진료를 할 수가 없단다.

이후 몇군데 더 알아봤지만 빠른시일내 예약 잡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OECD 자살률 1위라는게 확 와닿았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다니…

몇군데 연락한 끝에 가까운 날 진료가 가능한 병원에 예약을 했다.

아이는 우울증세가 있었고 강박증도 있다고 했다.

그 무렵 악몽을 자주 꾸고, 새벽에 깨서는 잠을 못 이룬다고 했는데 공부 스트레스 때문인가 싶어서 그리 심각하게 여기질 않았던거 같다.

우리도 입시를 준비하는 무렵에는 다 비슷한 증상들을 겪어보지 않았는가.

나 역시도 하루가 멀다하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울고나면 가슴이 좀 후련해져서 다시 마음잡고 공부하는데도 도움이 되었으니, 아이도 그 상태일 거라 생각한거다.

가뜩이나 마음이 힘든 시기에 다리까지 다쳐 움직이질 못하니 증세가 더 심해졌나보다.

일단은 약 처방을 받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는데, 남친과 갈등이 생기면서 우울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고3이 되면서 남친과의 갈등은 예견돼 있었다.

입시에 대한 스트레스로 자기 스스로도 추스르기 힘든 시기인데 남의 마음 헤아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고3 되기 전 이 문제에 대해서 아이와 얘기한 적이 있었다.

"고3 되면 아마 서서히 멀어질 거 같애"

말은 이렇게 해도, 정작 연락도 뜸해지고 만남조차 쉽지 않으니 서운함이 생기는 모양이다.

처음 딸의 연애를 알았을 때 서로 상처받을까봐 걱정이라 했는데, 그 땐 그말이 들리지 않았으리라.

얼마전 300일 이라며, 남친과 밥을 먹기로 했다고 잔뜩 이쁘게 꾸미고 나갔다.

생각보다 일찍 들어온 아이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공부해야 한다고 일찍 헤어졌댄다.


"엄마, 근데 나 너무 서운해.

내가 꽃을 받고 싶다고 했는데, 빈 손으로 왔어.

오는길에 꽃집이 있었는데도 안사왔어."


이렇게 얘기하는 아이에게

“걔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마음의 여유가 없었을거야."

라고 대답해 주면서도 나도 내딸이 서운한게 못내 속상하긴 했다. 고3 남자아이한테 바랄걸 바래야지 하면서도 예전과 사뭇 달라진 남자아이의 태도가 의아했다.

그 이후로 아이는 남친과의 관계가 어색해지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헤어지기도 힘들고 그냥 관계를 지속하는것도 힘들다고 하면서 우울해 하는 아이를 보니 속에서 천불이 난다.

하루하루 집중해도 시원찮을 고3이 남친땜에 속을 썩다니.

엄마인 내가 얘기해 주는건 별 도움이 안되는 것 같다.

결국은 지 마음 내키는 대로 둘수 밖에. 속 터지는 건 그저 내 사정일 뿐이다.


며칠을 고민하던 중 지난 주말, 쌍둥이 남매를 둔 이모네 집에 갑자기 가고 싶다고 한다.

쌍둥이 남매는 우리 아이보다 한 살 많고, 친 형제 처럼 잘 지내는 사이이다.

아이는 사촌언니가 보고 싶다며 짐을 싸들고 주말 에 떠났다. 중간고사가 코 앞이지만, 아이가 마음을 못 잡고 힘들어 하니 언니랑 얘기라도 실컷 하고 오라고 보냈다.


다음 날,

집에 온 아이는 남친과 헤어지겠다고 선언했다.

사촌언니와 오빠랑 새벽까지 얘길 했는데, 언니와 오빠가 당장 헤어지라고 난리를 치더란다.

니가 너무 아깝다고, 니가 훨씬 나은데 그런 애 땜에 마음아파 하는거 못보겠다고 화를 내더란다.

아이는 전적으로 자기편을 들어준 사촌들의 마음에 감동받아 자기가 이렇게 사랑받는 존재인지 몰랐 다고 언니 오빠 말이 다 맞다고 헤어질 결심을 하고 왔다.


이제사 얘기를 하는데, (그동안은 속에 묻어두고 혼자 끙끙거렸나 보다) 아이는 나름대로 관계를 잘 유지해 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편지도 길게 써서 주고, 남친이 감기가 걸렸을땐 일부러 등굣길에 따뜻한 차를 사서 갖다 주기도 했단다.

근데, 그 아이가 귀찮다며 편지를 읽지도 않고, 우리 아이가 아팠을때도 연락을 안했다고 하니 그간 서운할 만도 했겠다.

그 밖에도 얘기 안한 여러 가지 서운한 점이 쌓이고 쌓여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는게 힘들었나보다.

물론 남자아이 입장에서도 할 얘기가 많겠지만 어쩌겠는가, 난 내 딸 얘기만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을.


가슴에 쌓아 두었던 서운한 일들을 사촌들에게 털어놓으니 자기보다 더 펄펄 뛰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많이 풀린거 같다.

형제 없이 외동으로 크다보니 이럴때 형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한데 사촌들이 친 형제 못지 않게 챙겨주고 마음을 다독여 주니

무척이나 위안이 되었나보다.


그렇게 헤어질 결심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그래도 예쁜 모습으로 헤어지고 싶다며, 내 옷중에 이쁜걸 골라 입고 나갔다.


"울거니?" 했더니

"안울거야, 내가 그동안 마음 고생한거 생각하면 억울해!"

이렇게 큰소리 치고 나갔다. 금방 올거니까 걱정 하지 말라며 씩씩하게 나갔다.


그런데, 올 시간이 지났는데 안온다.

괜히 걱정이 된다.

어디 주저 앉아서 우는건 아닌지.

엄마 마음엔 차라리 빨리 헤어지고 입시 준비하는 게 낫겠다 싶으면서도 헤어지는 마음이 얼마나 쓰릴까,

걱정이 된다.


한참 후 걸려온 전화!

"엄마, 안 울려고 했는데, 얘기하다가 울어버렸어."

"그래, 그럴 수 있어. 괜찮아. 조심히 와."


속이 터진다.

내딸을 울리다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엄마인가 보다. 딸보다 더 속상 하다.

눈이 퉁퉁부어 집으로 들어온 아이는,

"엄마, 내가 걔한테 못한 말이 있어.그동안 나한테 잘해줬던거 고맙다는 말을 못했어."

"헤어진거 후회하니?"

"아니 시원 섭섭해."


이렇게 딸의 연애는 1년이 채 되기 전에 끝나고 말았다.

시원 섭섭하다고 해도 어찌 아무렇지 않을까.

학교에서 매일 볼텐데…

하루빨리 마음이 정리되길 바랄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중간고사가 얼마 안남아서 그게 더 걱정이다.

3학년 중간고사 내신이 얼마나 중요한가.

아이의 마음보다 중간고사가 더 신경쓰이는 나는 속물 엄마인가보다.



아이의 고3시절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싶어 연재를 기획했을때 아이에게 의사를 물어봤다.

"너의 남친 얘기를 써도 될까?"

"엄마 난 좋아. 넘 재밌을거 같어"

혹시나 오해가 있을지 몰라 이 글의 주인공인 아이 에게 사전에 허락 받았음을 알려둔다.



아이에게 감동을 주었던 사촌들.

한살 위 쌍동이 언니오빠와 한살 아래 여동생. (맨 왼쪽 핑크핑크가 딸래미)

한살 터울이라 싸울법도 한데,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싸움없이 서로를 위하는 사촌들이다.

언니에게 동생에게 우린 완전한 네 편이라는 확신을 받은 아이는 힘든 마음을 잘 이겨내고 중간고사 준비에 올인하고 있다.

같은 또래가 해주는 위로와 공감이 아이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6살 되었을 무렵, 개나리를 머리에 서로 꽂아 주고 양지바른 곳에 앉아 놀고 있는 우리 아이들. 이쁘고 고마운 존재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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