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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리 Dec 22. 2023

Lost in Borneo

제1장 번역하게 될 줄 몰랐어


(내가 파견될 때를 기준으로) 코이카 해외 봉사 단원이 되면 우선 두 달간 국내 교육을 받는다. 이후 임지로 가서 그 나라 수도에 머물며 2개월간 추가 현지 적응 교육을 받는다. 즉, 정식 활동 전에 진행되는 교육 기간만 약 4개월인 것이다. 물론 이 기간은 더 늘어날 수 있는데, 국내 교육 이후 각 나라별 비자 발급 기간에 따라 다르다. 인도네시아처럼 비자 발급이 늦는 나라는 보통 2~3개월 이상 기다렸다가 임지로 가서 국외 교육을 받는다(*다만 현재는 코이카 봉사 단원 모집 형태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니, 새롭게 변경된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를 참조하길 바란다). 


나는 2개월간의 국내 교육 종료 후, 비자 때문에 꼬박 두 달을 집에서 대기했다가 출국하여, 다시 2개월간 현지 적응 교육을 받았다. 즉, 코이카 국내 교육 시작일 이후 (비자 때문에 중간에 2개월간 대기한 기간을 포함하여) 모든 교육이 끝나기까지 6개월이 걸린 셈이다. 반면 비자 발급이 빨라서 국내 교육 이후 단 며칠 만에 출국했던 타 국가 단원들은 내가 인도네시아에 도착할 무렵에 이미 현지 적응 교육을 마치고 정식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국내 교육 기간 내내 인도네시아가 비자 발급이 까다롭기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혼자서 그 긴 기간을 멍하니 기다리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비자가 발급되는 순간 최소 1~2주 내에 출국해야 하니, 어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어려웠다.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려는 사장은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국내 교육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며 호감을 느꼈는데, 대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감정들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코이카 단원이 되면 각 파견 국가의 언어와 문화를 집중적으로 배운다. 사실 나는 그 수업을 꽤 좋아했다. 인도네시아어가 다른 언어에 비해 처음 접하기에 쉬운 편에 속하기도 했고, 복수형 명사를 만들 때 두 번씩 말하면 되는 단순한 표현법도 좋았다. 현지어 교육 기간은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의 이모저모를 배우며 친근해질 수 있는 계기였다. 


처음에 봉사 단원으로 지원할 당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이후 현지어와 현지 문화를 공부하면서 인도네시아 생활에 큰 기대를 했다. 하지만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지자 그 ‘호감’은 ‘비호감’으로 바뀌는 듯했다. 어느 날 코이카 국가 담당 직원에게 ‘이렇게까지 대기 기간이 길면 파견국이 바뀔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인도네시아를 향한 호감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당시 나는 기다림에 지쳐 파견국이 바뀔 수도 있다는 아쉬움보다는 ‘그렇게 해서라도 빨리 출국하게 해줬으면’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언제쯤 출국할 수 있는 건가’ 하며 또 한숨 푹 내쉬던 어느 오후, 나는 드디어 비자가 발급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렸던 탓인지 고대하던 비자가 나왔다는 데도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연락받은 후에 나는 몇 번이나 짐을 풀었다 넣기를 반복했던 3단짜리 이민 가방을 조용히 현관 앞에 놓아두었다. 아침 일찍 공항에 가야 하니 짐을 챙기느라 허둥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느꼈던 기대와 설렘의 기억이 모두 사라질 정도의 긴 기다림 끝에 도착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자카르타의 습한 공기, 오토바이 경적, 그리고 희뿌연 하늘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희로애락 가득했던 2개월간의 현지 적응 교육이 시작되었다. 


며칠 후 인도네시아의 주요 도시들에서 극우 이슬람 세력에 의한 연쇄 총격 테러가 발생했고, 죄 없는 서민들이 죽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학창 시절 교과서로만 접했던 종교전쟁, 문화 갈등의 극단적 사례가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날에도 나는 가방을 메고 현지어 교육을 받으러 갔다. 위험할 수 있으니 숙소에 콕 박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종교 테러는 인도네시아에서 그렇게 낯선 일이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했다. 지금에서야 툴툴 털 듯이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집 밖을 나가기가 무서웠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미어캣 자세로 보낸 어느덧 2개월이 흘렀다. 아쉬움과 고마움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교육 수료식을 마친 후, 드디어 내 파견 기관이 있는 임지로 떠났다. 내 임지는 보르네오(Borneo)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칼리만탄섬에 있었다. 


마음속으로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잘해보자!’를 외치며 임지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임지까지는 하늘길로 약 1시간이 소요되었는데, 한 30분쯤 지나자 하얀 구름이 사라지고 어둠이 보였다. ‘이게 뭐지?’ 싶어서 자세히 내려다보니, 비행기 아래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밀림이 있었다. 


‘이럴 수가. 이제 나는 밀림에 사는구나.’


갑자기 눈물이 또르르 뺨 위를 타고 내려왔다. 그때 왜 갑자기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제는 정말 나 혼자라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자카르타만 해도 서울처럼 고층 빌딩도 많고 사람도 북적거렸는데, 적도가 지나가는 밀림 근처에 자리 잡은 임지의 풍경이 왠지 세상과 고립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으리라. 


비행기 창문 아래 펼쳐진 풍경을 봤던 그 순간의 충격은 상당히 컸지만, 지금 다시 그때를 생각하면 코웃음이 난다. 사연 있는 여자처럼 조용히 훌쩍거리던 나를 옆 좌석 승객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힐끔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그날 흘린 눈물이 무색하게도 난 가끔 그때가 그립다. 만약 임지로 향하던 날의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면,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과거의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도네시아어 번역가로서의 삶. 탈출구가 없는 것처럼 거대한 밀림에 압도당해 훌쩍이던 지난날의 내가 결국 밀림의 언어에 푹 빠져 있는 아이러니한 미래를 본다면. 과연 그때도 계속 울기만 할까?


한국의 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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