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낳은 사회 문제 <2>
사회적 신뢰의 파괴
한나 아렌트의 철학에 따르면 원자화된(=극도로 파편화된) 개인은 전체주의 체제의 군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동일 사회에서 공통 가치로 묶여 있지 않은 채 '각자도생'해야 하는 사람들이 극단성을 띨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존을 목적으로 투쟁하다시피 살아야 했던 개인 간의 최소한의 신뢰는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인해 완전히, 철저히 무너졌다. 이 시기에야말로 사회의 극단적 파편화가 발생한 것이다. 예전엔 '이 사람이 내게 (물리적 또는 금전적)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까'를 의심했다면 이 시기의 상호 의심은 '감염 여부'로 인함이었다. 대중교통에서 내 옆에 앉은 이 사람이, 건너편에 앉은 저 사람이 감염자인지 아닌지를 의심하게 됐고, 모두가 마스크를 벗고 밥을 먹거나 음료를 마시는 식당 및 카페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는 길을 갈 때도 그리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내 건강을 위협하는 잠재적 보균자가 되어버린 것이다(그런 '나'마저도 타인에겐 '남'으로서 잠재적 보균자 취급을 당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마스크로 입과 코를 다 가린 사람에겐 상호간 의심의 눈초리가 다소 거둬졌지만, 조금이라도 코를 밖으로 노출시킨 사람에게는 따가운 시선이 집중됐고, 그 사람은 의식적으로(일부러) 그리했든 부주의하여 그리했든 간에 그 즉시 '공공 안전'과 '사회 질서'를 저해하는 악한(惡漢)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나' 또는 '남'이었던 사회적 이분법이 전이하여 타인은 다시 '확진자' 및 '미확진자'로 새롭게 분류됐다. 다만 예외는 존재했는데, '내가 아는 사람(=지인)'이란 이유로 같이 다니거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신 이는 의심 대상에서 제외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의도적으로 의심 대상에서 배제했다. 그러나 지인이라도 확진자와 접촉했거나 확진 판정을 받으면 당분간 기피 대상이 됐다. 그 사람은 '확진자'의 범주에 속했기 때문이다. 모르는 이라면 비난이라도 했겠지만 아는 이가 그리 됐다니 뭐라 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꽤나 많았을 것이다.
일평균 확진자가 1-30만(10일 전 기준)을 넘어 4-60만을 오르내리는 지금, '확진자'와 '미확진자'의 경계는 이전보다 더욱 모호해졌으며, 계속 모호해지고 있다. 허나 구태 방역 체계가 아직도 작동하는 한, 그 경계는 또한 끊임없이 선명해진다. 더 이상 바이러스 전파를 차단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수의 국민과 변이 바이러스에 맞게 방역 체계를 개편 또는 전환하지도, 이를 위해 국민에게 적극적으로 이해를 구하지도 않았던 정부 또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