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중순, 제주는 연말의 한파를 한차례 보낸 후론 큰 추위가 아직 없다. 수목원 야생화원은 갈색의 억새들과 매끈한 줄기의 배롱나무, 흔적이 얼마 남지 않은 야생초들이 간간이 보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비자나무, 담팔수, 참식나무 등이 여전히 생기롭다. 직박구리들은 삐-익하는 긴 쇳소리를 내며 분주히 날다 다닌다. 그러다 빨갛게 익은 백량금 열매로 배를 채우는 것을 보았다. 주위 바닥을 보니 도토리가 있어 위를 올려다보니 종가시 나무다. 올해 꽤 많은 열매를 맺었다.
여기 참나무 숲은 넓고 어둑한 그늘을 가지고 있다.
그 짙은 어둠 덕분인지 모양과 색깔이 다양한 버섯들이 나무 밑동마다 요술처럼 솟아난다. 겨우살이나 사슴벌레 같은 곤충들에게도 집을 내어 주고 부지런히 열매를 맺어 늦겨울까지 청설모나 멧돼지들의 허기를 채웠다.
엄마들의 일이란 게 참나무 같지 않은가? 벌을 홀리는 매화의 향기를 뿜어 내거나 벚나무처럼 탐스러운 꽃을 피우는 일이 아니다. 매일 따뜻한 밥으로 식구들의 허기를 채워주고 구석구석 찌든 때를 닦아내는 일. 그래서 사람 살만한 곳으로 가정을 가꾸는 일. 묵묵히 사람들의 사계절을 돌보는 일이지만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인정은 여전히 박하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은 대개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것과 관계되어 있지 않던가?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안락한 가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동물이다. 모성은 신성처럼 문명에 의해 박제되어 있어 상실은 금기처럼 작동한다. 이상적 공동체를 가정에 구현하기 위해 여성은 엄마가 되면서부터 사회적 금기를 거스르지 않기에 몰입한다. 하여 엄마의 일이란 외로운 일이고 서글픔의 시간들이 나무의 옹이처럼 몸뚱이에 박히는 것이다.
서울살이 하던 시기, 창 밖이 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이었다. 내 방의 길가 쪽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깥으로 나갔더니 나이 육십은 넘은 듯한 여성이 빌라 입구 한 켠에 수그리고 있었다. 술 냄새가 조금 났다. 집을 나왔다고 했다. 그분 아들의 연락처를 받아서 전화를 걸어드리니 섭섭하다는 말들이 오고 갔다. 전화를 끊고 그가 오기를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이해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가끔은 한 해 부지런 떨면서 일을 해도 도토리 한 줌 같은 날들이 있다. 가족을 돌보는 일이란 누가 알아주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외로울 수밖에. 그러나 끝까지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오직 도토리를 모았던 즐거운 기억 밖에 없고 가족들에게 남길 수 있는 것 역시 함께 나눈 기쁨이지 않을까?
외로움에 의연해지자. 그리고 순간의 떠들썩한 즐거운 감정들은 땅 속에 있는 뿌리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밑동만 적시고 끝나고 만다는 사실에 조금 더 진지해지자.
엄마의 일은 상록수처럼 겨울이 되어야 진가가 드러나는 일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