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 메시지를 본다면, 부탁이 있어요.
[현재 시각 – 오후 10시 15분, STAR그룹 수시통계파트 임시 사무실]
어둠이 내린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고, 스탠드 하나만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정하윤은 타블렛을 두 손으로 들고,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야.”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강시후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좌표?”
“아니. 마지막 타임캡슐. 누나가 보냈던 것 중,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은 파일이 하나 있어. 암호화된 구조로 숨어 있었어.”
정하윤은 화면을 돌렸다.
한 줄의 이상한 문자열.
그건 좌표도, 이름도, 명확한 날짜도 아닌… 단순한 ‘디지털 사인’이었다.
##META_X-[GLASS:23]-SEEDLOCKED##
강시후가 눈을 찌푸렸다.
“…좌표가 아니라 메모리?”
정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메시지를 시간으로 보낸 게 아니라, 공간에 숨겼어. 데이터의 움직임을 감지하면 특정 조건에서만 발현되는 ‘메모리 좌표’야. 일종의 디지털 유령 같은 거지.”
“그럼 이건…”
“‘보이지 않는 타임캡슐’이야. 그냥 시스템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있어.”
정하윤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화면 속에서 암호화된 메모리가 분석되기 시작했다.
“이걸 만든 건… 누나야. 근데 이걸 찾게 해준 건…”
“성찬이지.”
정적이 흘렀다.
강시후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 우릴 이 길로 오게 만들기 위해 이걸 남긴 거야. 결국…”
“우리가 판 위에 서야 하는 수밖에 없게 됐어.”
분석이 완료되자, 화면에 새로운 명령어가 출력됐다.
� 암호 해제 완료 – 출력 위치: 내부 백업서버 / 연동 파일 1건
� 파일명:
GLASS_MEMO_2317.MXK
� 힌트 좌표: 37.48291, 127.01729
정하윤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서울 근교야. STAR그룹 구 사옥이 있던 지역.”
강시후는 벌떡 일어섰다.
“가자. 그 좌표—거기 뭔가 있을 거야.”
정하윤도 함께 일어섰다.
그의 눈에는 오래 묻혀 있던 감정이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나가 보낸 마지막 타임캡슐, 이제야 찾았어.”
둘은 각자의 태블릿을 닫고, 정적 속을 뚫고 밖으로 나섰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거우면서도, 한없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단순한 진실 찾기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숨기고, 누군가가 유도했던 마지막 조각을 찾는 여정이었다.
[다음 날 오전 8시 40분 – 서울 강남 외곽, STAR구 구사옥 뒤편 언덕]
바람이 차가웠다.
도시와는 거리가 멀지 않지만, 이곳은 이상하게도 사람의 흔적이 드물었다.
정하윤은 지도를 확인하며 말했다.
“좌표가 정확히 여기를 가리키고 있어. GPS 오차범위까지 고려하면 이 건물 뒷편, 저 나무들 사이.”
강시후는 삐걱대는 철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방치된 듯한 부속 건물 하나가 그들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벽은 갈라졌고, 유리창은 먼지에 덮여 있었다.
“STAR그룹 본사 이전 전, 이쪽이 연구개발 부서였다고 들었어. 지금은 지하 통로도 다 폐쇄됐을 텐데…”
“지하.”
정하윤의 말에 강시후가 눈을 빛냈다.
“혹시 몰라서 준비해 왔어. 열화상 카메라 앱, 전력 반응 체크용.”
시후가 벽을 따라 열화상 화면을 비췄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미세한 붉은 반응이 포착됐다.
“여기. 전류가 돌아.”
정하윤은 급히 바닥을 살폈다.
낙엽 아래 숨겨진 철제 해치를 발견하고, 먼지를 털어냈다.
오래된 자물쇠와 녹슨 손잡이, 그러나 강시후는 힘을 줘서 그것을 열었다.
끼이익—
그 아래엔 곧게 내려가는 금속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불이 꺼진 복도가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정하윤은 손전등을 켜며 속삭였다.
“지하 실험실… 맞는 것 같아.”
둘은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한 발 한 발, 낡은 금속이 발밑에서 울렸다.
[지하 – 내부 통로]
불빛이 닿은 벽엔 ‘SC-LAB ARCHIVE’라는 문구가 흐릿하게 보였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전원은 살아 있었다.
“전자식 락이다. 시후…”
강시후는 태블릿을 연결해 보안 패널에 접속했다.
“성찬이 쓴 코드 패턴… 기억나? Ω-3.”
“응.”
“그걸 거꾸로 해석해서 조합한 패턴이야. 이건 일부러 남겨놓은 거야.”
전자 패드에 코드를 입력하는 순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실험실 내부]
내부는 생각보다 정돈되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봉인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정리하고 떠난 공간.
그리고… 중앙 테이블 위에 놓인 하나의 ‘타임캡슐 기기’가 이질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정하윤이 속삭였다.
“이건… 예전 모델이 아니야. 성능 상향된 프로토타입이다.”
강시후는 천천히 다가가 그 위의 디스플레이를 확인했다.
� 메시지 보관 중 (4년 전 입력됨)
� 송신 실패 – 수신자 인증 불일치
“…지윤 누나가 보낸 거다.”
정하윤의 눈이 흔들렸다.
“누나가 이걸로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고… 전송에 실패했어. 그리고 그 기록이 감춰졌던 거야.”
“우릴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건…”
“…성찬이야.”
정하윤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 우리가 이걸 열 수 있다면—진짜 회신을 받을 수 있는 거야.”
강시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기기를 활성화했다.
� 인증 절차 진행 중…
� 실시간 복원 모드 실행
� 예상 수신 대기 시간: 3분 12초
복원이 시작되자, 실험실엔 작게 진동이 일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 그러나 무엇인가 돌아오고 있었다.
타임캡슐, 그리고 사라졌던 진실.
정하윤은 손끝을 꽉 쥐었다.
‘누나… 이번엔 진짜로 마주할 수 있을까.’
― “누군가 이 메시지를 본다면, 부탁이 있어요.”
[지하 실험실 내부 – 3분 후]
전자음과 함께 스크린에 불빛이 번졌다.
복원 프로세스가 완료되자, 타임캡슐 기기에서 영상 하나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정하윤과 강시후는 숨을 죽인 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영상 기록: 4년 전, 정지윤 박사 타임캡슐 송신 직전]
촬영 위치: STAR그룹 비인가 실험실 내 연구 구역
화면에는 피곤하지만 또렷한 눈빛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정하윤의 사촌 누나, 정지윤. 그녀는 흰 실험복 위에 회사 명찰을 달고 있었다.
“이걸 보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지금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어요.”
“이 실험은 원래 시간이동 알고리즘의 안정성 검증을 위한 거였지만, 누군가 이걸 무기로 사용하려 했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손끝으로 서류 뭉치를 눌러가며 계속 말했다.
“그 사람… 상무 이태석. 그는 시간 캡슐 기술을 고객 이벤트로 포장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선택적 미래 제어’를 위한 알고리즘 개입 실험을 진행 중이었어요.”
“그리고… 난 그걸 막으려다, 곧 이 연구소에서 나가게 될 거예요.”
정하윤의 눈동자가 떨렸다.
누나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이 기술은, 미래를 바꾸는 게 아니라 조작하는 거예요.
그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그래서 누군가는… 진짜 용기를 내야 해요.”
정지윤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모니터 너머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혹시, 하윤… 네가 이걸 본다면—”
정하윤은 숨을 멈췄다.
그의 이름. 직접 불린 그 이름.
“내가 너한테 아무 말도 못한 채 사라졌지… 미안해.
근데 나, 너한테 기대고 싶었어. 항상 너는 올바른 사람이었으니까.”
“이 기술이 세상에 나가도 괜찮을까, 판단해줘.
내가 실패했다면, 네가 이어줘.”
그녀의 눈이 살짝 붉어졌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그저 누군가에게 마지막 바람을 전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시후씨. 만약 당신도 이 메시지를 보고 있다면…
그때 회식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건넸던 인사 기억하세요?”
“당신처럼 사람을 믿는 사람이, 이 시스템을 끝까지 지켜봐줘야 해요.”
강시후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난 믿고 있어요. 누군가는 ‘미래’라는 이 칼날 위에서
끝까지 사람을 먼저 생각할 거라고.”
마지막 장면에서 정지윤은 타임캡슐 버튼을 누르고, 조용히 기계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영상이 멈췄다.
정적.
그리고 정하윤의 손이 떨렸다.
“……누나.”
그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입술 사이로 겨우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살아 있었어. 마지막 순간까지.”
강시후는 조용히 그의 곁에 앉았다.
그도 눈을 감았다.
“하윤아, 이젠 선택해야 해. 이걸 숨길지, 아니면…”
“세상에 보여줄지?”
정하윤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다시 맑아졌다.
단단히, 흔들림 없이.
“누나는 나한테 넘긴 거야. 이 선택을.”
“그래.”
강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진짜 회신이야. 우리가 들어야 했던 진짜 진실.”
—
그리고 그 순간, 모니터 하단에 뜨는 한 줄의 메시지.
[추가 알림: 제3회신 예고 – 성찬 발신. 도착 예정: 24시간 후]
정하윤과 강시후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성찬이… 또 뭔가를 준비했어.”
그리고, 곧 시작될 다음 회신을 위해
두 사람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너, 우리 편 맞아?”
[현재 시각 – STAR그룹 AI상담센터 옥상, 오후 5시 20분]
정하윤은 조용히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캔 커피는 반쯤 식어 있었고, 머릿속은 더욱 복잡했다.
뒤이어 올라온 강시후가 묵묵히 그의 옆에 섰다.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아직도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겠어.”
정하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누나가 그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기까지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의 말에 강시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보다 더 복잡한 게 있어.”
하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성찬.”
“…응.”
“도대체 왜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거야?
누나에 대한 기록을 우리가 보게 만든 것도, 그리고 지금도 계속 뭔가를 회신하고 있다는 것도… 전부 성찬이 주도한 거잖아.”
강시후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의 성찬은… 단순히 시스템을 바꾸려는 게 아니야. 누군가를 시험하고 있어. 아마 우리 둘 다.”
정하윤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럼, 너한텐 성찬이 아직 ‘동료’야?”
“…글쎄. 그건 그가 이 판에서 뭘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강시후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지금은,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해.”
정하윤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시후야, 혹시… 성찬이 나한테도 조작된 정보를 준 걸까?”
“가능성은 있어. 널 시험하려 했을 수도 있고, 정말로 협력하려 했을 수도 있어.”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야.”
“…뭔데?”
“너, 성찬의 편에 설 생각…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정하윤의 표정이 굳었다.
바람이 옥상 위로 스쳐지나갔다.
“난 아직 선택하지 않았어.”
“그건 위험한 거야. 성찬은 지금, 시스템을 갖고 움직이는 사람이야.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과를 계산하고 있을지도 몰라.”
정하윤은 캔을 내려놓고 말없이 창 너머를 바라봤다.
“…너도 누굴 믿는 게 두려운 거구나.”
“응. 맞아.”
강시후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난, 너한테 묻고 싶었어.”
그는 천천히 한 마디를 꺼냈다.
“너, 우리 편 맞아?”
정하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고, 복잡했으며… 조금은 슬펐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우리 편이야. 하지만 우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건, 네가 있기에 가능한 거야.”
강시후는 짧게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 사이의 신뢰가 단단히 다져진 듯했다.
[같은 시각 – 비인가 서버룸 내부, 성찬]
성찬은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윤 선배, 시후 형… 이제는 판단했겠지.”
그의 눈엔 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의심, 기대, 그리고 외로움.
그는 추가 캡슐 회신 전송 예약을 걸었다.
[캡슐 발신: 성찬 / 제목: "선택 이후의 책임"]
수신자: 강시후, 정하윤
발송 시간: 12시간 후
“그리고 이건…”
그는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너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나에게 보여줘야 할 차례야.”
타임캡슐 기술의 근본 구조를 해독한 강시후,
그리고 정하윤의 손에 떨어진 선택권.
“시간을 바꿀 수 있다면, 너는… 무얼 바꾸고 싶어?”
운명을 바꾸려는 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자의 충돌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