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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conut Dec 01. 2021

네가 가라

2020년 12월 코로나는 3차 대유행으로 일일 신규 확진자 수가 1000명에 이르며 매일매일 확진자 수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렇게 확진자 수가 많아지니 병원에 입원할 자리가 부족하여 자택에서 대기하다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와 여러 병원의 노력으로 긴급하게 격리 병실을 마련했으나 이번에는 환자를 볼 의료진이 부족해졌다.


이렇게 우리 병원에서도 전공의들을 차출하기 시작했고 이비인후과에서는 전공의 1명을 음압격리병동으로 보내달라는 공문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전공의 4년 차는 전문의 시험을 보기 위해 병원을 떠난 상태로 1~3년 차로만 병원일을 감당하고 있어 이미 일손이 부족한 상태였고 병원 표현으로는 보릿고개라고 부른다.

1년 차는 당직부터 시작해서 많은 일을 하기에 보낼 수가 없었는데

다행인 부분이 있다면 3 차는 다른 연차에 비해서 1명이 많았는데 이는 군 위탁 편입이라는 제도 때문이다.

군 위탁 편입은 사관학교 학생 중 성적이 훌륭한 학생을 유명 의대로 편입하여 의사가 되고, 유명 대학병원에서 좋은 수련을 받을 기회를 주는 대신 군대에서 10년을 의무적으로 복무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를 통해 군대에서는 오랫동안 근무할 군위관을 확보한다는 장점이 있게 된다.


그럼 인력이 조금 있는 3년 차들이 후배를 위해 갈까?

당연히 정답은 No이다.

결국 "사정이 이러니 너네 중에 1명 정해서 알려줘. 서로 가기 싫으면 너네 중에서 제비뽑기 하던가."

당시 나는 2년 차였는데 동기 2명 중 1명은 다음 달에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위험한 곳으로 갈 수가 없었고, 1명은 가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기들을 위해 내가 가겠다고 손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음압격리병동으로 가게 되었다.

코로나 확진 환자들로 여러 장기 기능이 떨어져서 투석, 인공호흡기 치료 등을 받는 환자들이었다.

중환자들이 많았기에 주로 감염내과에서 환자들을 살피고 치료 방침을 결정하였고, 나는 환자 처치를 담당하였다.


마스크가 벗겨지면 나도 걸릴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도 되었고 답답한 보호구로 인해서 매일매일 땀으로 샤워를 했다.

특히 첫날에는 긴장을 했는지 마스크를 팔로 쳐서 휙 돌아갔고 황급하게 숨을 멈추고 다시 착용도 했다.

물론 코로나 음압병실에서 근무하는 만큼  나 또한 1인실에 격리되어 생활하였고 쉴 때도 쉬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묵묵하게 사명감을 갖고 맡은 임무를 다하고 이비인후과로 돌아왔다.


격한 환영과 감사의 인사를 받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들은 말은 "너는 다른 데에 있었으니까 밀렸던 일 좀 하자."였다.

화가 나지는 않았고 참 허무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들도 하기 싫다.

물론 그런 일을 후배들에게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치료제도 없는 시기에 목숨을 걸고 가는 후배에게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부디 이런 사람들이 내 선배들 이외에는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서 생활치료센터에 전공의 한 명의 차출이 필요한 날이 왔는데 나는 이번에는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자 그 선배는 1년 차 한 명을 지목해서 보내버리고 당신은 즐거운 휴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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