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야, 안녕?
<장애인 활동지원사>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다.
그러니까 동행자를 만난 지도 1년이 된 것이다. 동행자는 태어나서 한 번도 ‘빛’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전맹 시각장애인이다.
일의 특성상 동행자와 밀접하게 붙어 다녀야 하므로 서로의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공유하게 된다. 동행자는 순수하고 솔직한 편이지만 상대에 대한 실망스러운 부분을 대놓고 이야기할 만큼 모질지도 못하다. 불편한 점이 있어도 먼저 말하지 않고 참는 편이라, 나는 더 자주 괜찮은지 묻게 되고 동행자의 의견을 들으려고 노력한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해서, 내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거나 그들의 요구를 거부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그런 사례들을 종종 목격했으며, 동행자 역시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피고용자는 '나'이므로 되도록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당연한 권리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동행자의 방문 앞에서 똑똑- 노크를 했을 때 그녀는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지금껏 제 방에 노크하고 들어오는 사람은 선생님뿐이라서요…"
성인으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그녀의 기본권은 노크뿐이 아니었다.
'배려'란 단순한 친절함과는 다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구분해서 예의를 담아 행동해야 한다.
나와 만나기 전까지 동행자는 거의 걷지 않았다고 한다.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만큼 운동량이 없다 보니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물론 전맹이라는 장애는 스스로 걷는데 큰 용기와 도움이 필요하다.
방학 내내 우리는 보라매공원 안에 있는 트랙을 걸었다. 그녀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과 집사님들이 함께 해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엔 2바퀴로 시작해서.. 5바퀴, 7바퀴... 나중엔 10바퀴씩 돌았다. 목사님부터 대부분의 신도들 역시 시각장애인이다. 그들에게 걷는 운동조차 혼자서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커다란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오직 오른쪽 팔만 내어주면 된다.
나는 기꺼이 양쪽 팔을 내어주기도 했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조금 다른 길로 걷기 운동을 나섰다.
남산 산책로에는 <배려의 길>이 있다.
직접 가보니 산책로 한가운데에 점자블록이 끊기지 않고 잘 이어져있었다. 사실 점자블록이 끊기지 않고 끝까지 되어있는 곳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동행자 역시 케인(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흰 지팡이)을 가지고 다니지만 사용하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날은 케인도 펼쳐보고 길 한가운데서 편하게 연습도 할 수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곳에 <배려의 길>이 생겼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것은 <생존의 길>이므로.
산책길을 내려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벤치에 앉았다.
무심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는데 홈이 패인 지붕 한쪽이 마치 반쪽짜리 하트로 보였다. 그저 홈이 패인 지붕이었지만 손으로 모양을 잡아주니 하트가 완성되었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만들어지는 것.
결코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지난 1월 23일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무슨 선물을 준비할까 고민하다 고른 녹음인형. 손바닥을 길게 두 번 누르면 녹음할 수 있고, 한 번 누르면 녹음된 부분을 들을 수 있다. 간단한 축하메시지를 녹음해서 선물해 주니 무척 신기해하며 좋아하던 그녀.
(녀석은 돼지인가, 토끼인가?)
눈길을 건네기보다 따뜻한 목소리로 다가서는 것,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고,
그들의 선택을 기다려 주는 것.
갑작스러운 손길보다
부드러운 말로 방향을 알려주고,
팔을 내어주고 함께 걸어가는 것.
침묵이 불편할까 염려하기보다
그들의 세계에 조용히 맞추어 가는 것.
빛이 아닌 마음으로 보려는 노력.
배려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 깊이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
by. 예쁨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 모든 걸 포기하는 대신에 계속 걸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환상 같은 감정 일지라도 무언가 새로운 것이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는 계속 걸어나가야 한다.
- 알베르토 자코메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