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경험 관리의 우선순위 : 1. 안전한 진료
현재 환자 경험 관리에 있어서 최전방에 있는 곳은 바로 미국의 클리블랜드 클리닉(Cleveland Clinic)이다. 이곳에서는 환자 경험 최고관리자(CXO, Chief Experience Officer)가 환자 경험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다. (중략)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우선순위의 첫 번째가 '환자 만족(Patient Satisfaction)이 아니라 '안전한 진료(Safe Care)'라는 것이다.
책 <스마트한 병원 경영 성공 병원의 비밀 노트> 중
환자(고객) 경험의 첫 번째는 바로 '안전'이다.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는 내내 불안함을 느낀다면 두 번 다시 그 병원으로 향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에게 안전함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내부 고객인 직원들부터 느끼게 해야 한다.
다음은 B 치과에서 근무할 때 있었던 에피소드다. 이직했던 B 치과는 바쁘지 않은 동네 치과였다. 야간진료를 했던 전 직장에 비하면 정말 꿀 같은 휴식시간이 많은 곳이었다. 함께하는 직원들과 간식 먹을 시간도 있었고 이야기를 할 시간도 있었다. 야간진료와 오버타임도 없는데 심지어 월급도 훨씬 더 많이 받기로 했던 곳이라서 연차가 낮았던 그 시절에는 정말 꿈과 같은 직장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시간은 늘었는데 환자의 진료 시간은 줄었던 것이다. 진료는 편법으로 진행되는 부분도 많았다. 정석대로 진료하던 곳에 있다 이직하니 이게 무슨 진료인가 싶을 정도였다. 분명 치석제거(스케일링) 이후 치주(잇몸)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그냥 약 처방이면 됐다. 환자들은 좋아했다. 항생제와 진통 소염제를 먹으면 증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프면 다시 약 처방을 받으러 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잇몸 밑에 있는 염증조직과 치석들은 그대로 남아 치주염은 계속 진행 중인 상태인 경우가 많았다. 백번 양보해서 자신이 치료할 수 없다면 적어도 환자의 현 상태를 알려주고 더 큰 치과로 의뢰를 하던지, 타 치과에 가보라는 언급 정도는 했어야 했다. 고작 2년 차였던 난 환자에게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진단은 치과의사의 영역이고 감히 원장님의 진단을 뒤엎는 발언은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은 신기하게도 매출이 이전 직장보다 훨씬 높았다. 이유인즉슨, 신경치료나 치주치료 그리고 사랑니 발치 같은 건강보험진료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무조건 비보험 진료를 밀어붙여 진단을 했고 진료를 했다. 그 결과 매출 인센티브로 전 직장에서 받던 월급보다 수십만 원 이상 받은 적도 있다. 어렸던 난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진료의 정석에 얽매여 돈 안 되는 진료를 바쁘게 하던 전 직장이, 그렇게 바쁘게 살던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진료 정석의 중요함을 절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 중학생의 어금니 신경치료 중 발치를 해야 한다는 상담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알고 보니 그 진료는 신경관 길이 측정 기구 없이 진료를 하다 천공이 되어, 치아를 살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염증이 호전이 되지 않아 발치를 해야 한다는 상담을 해야 했다. 이건 상담이 아니라 사기였다. 손이 떨렸다. 1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난 잊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신경치료에 대해서는 정석으로 배웠던 나였는데...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때 알았다. 근무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편법이 난무하는, 정말 사기를 치는 수준의 상담을 해야 하는 곳이라면 난 일 할 수 없다는 것을.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곳보다 환자가 정말 안심하고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다음 이야기는 C치과에서 근무할 때였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스포츠형 상담을 하던 곳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시스템이긴 한데 상담실장이 먼저 예진(환자의 병을 자세하게 진찰하기 전에 미리 간단하게 진찰하는 일)을 보고 상담을 하던 때가 있었다. 치과의사의 시간을 절약해 한 사람이라도 더 진료를 하자였던 예전에는 왕왕 쓰이던 시스템이었다. 앞서 설명했듯, 진단은 치과의사의 영역이고 의무이기에 지금은 대부분의 치과에서 하지 않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C치과는 애초에 진료보단 매출에 포커싱이 되어있던 개원치과였다. 처음에는 몰랐다. 환자 초진 상담을 할 때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받았다. 알고 보니 충치 관련한 진단과 상담은 담당하는 실장이 하라는 암묵적 룰이 있었다. 사실 페이닥터의 경험 없이 개원했던 개원의인지라 자신 있게 진단을 내리지도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충치 진단이야말로 치과의사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진단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임상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환자의 구강위생상태에 따라 진단이 달라진다. 그래서 충치 진단만큼은 전적으로 담당 치과의사의 진단에 따른다. 사실 이런 상황일수록 상담자와 담당의와의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케이스 디스커션(discussion)을 하며 합을 맞춰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전 글에도 언급했듯이 성장형 실장이 아닌 완성형 실장을 원했던 대표원장과는 작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고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상호 보완하기 위해 함께하는 팀원들과 서로 교차 확인을 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이것의 중심은 환자에게 '안전한 진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기관에서는 제일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의사들이 직원들과 케이스 디스커션을 꺼려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디 감히?!"라는 말이 되돌아오고는 한다. 우리가 환자에게 전달하는 의료서비스가 정말 안전함을 기초로 하고 있는지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내부 직원이 가장 먼저 느껴야 한다. 과연 우리 치과는 권리를 말하기 전 의무를 다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