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아이들과 친정으로 갔다. 방학이면 일주일 정도 친정에 머물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궁금해서 전화했다. 방학했냐?"
"아니오. 곧 해요. 이번 방학이 늦어요. 방학하면 바로 갈게요."
방학 때가 넘은 것 같은데 아이들이 오지 않자 평소 딸에게 전화하는 일이 드문 아버지가 전화를 하신 것이다.
그만큼 이번 여름방학은 늦게 시작되었고 한 학기 마무리가 더뎠다. 하지만 결국 학기가 종료되었고, 방학날 전날 미리 가방을 싸서 끝나자마자 친정으로 향했다.
친정에 가면 할 일은 뻔하다.
일단 청소를 하고, 냉장고 정리를 한다. 혼자 사시는 아버지는 본인이 주무시고, 입고, 식사하는 딱 1인분 만큼의 공간만 차지하고 나머지 공간은 철저히 무관심하시다. 밥도 매끼 먹을 만큼만 딱 한 가지 국 또는 반찬으로만, 빨래도 매일 입고 난 후 빨래하며, 자는 공간도 본인 누울 공감만큼만 필요하다는 게 아버지 설명이다.
사람이 사는 게 다 먼지로 돌아가는지 집안은 어수선하다. 그래서 집에 가면 제일 먼저 할 일이 청소인 것이다.
아이들은 외려 걱정이 없다. 쿵쾅 뛰어도 상관이 없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도 피부가 새까매질까 그게 걱정이지 밖에 나가 놀면 더 좋다. 집과 학교 갈 걱정도 없고, 할아버지라는 울타리가 있으니 엄마가 크게 혼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도 있고, 더군다나 아무 때나 틀어놓는 TV까지 있으니 금상첨화 아이들도 외갓집 가는 날만 기다리는 이유가 다 있다.
내 고향 전북 장수는 이름 그대로 물이 길고 많고 깊은, 어딜 가나 산으로 둘러싸인 농촌 중의 농촌이다. 유명한 관광지도 없고, 누구나 알만한 맛집도 없고, 읍내라고 해야 걸어서 5분이면 끝난다.
결혼 전에는 카페도, 빵집도 정말 없었는데 결혼 후 10년 동안 갈 때마다 알만한 프랜차이즈, 편의점도 몇 개 생겼다. 그래봐야 롯데**, 파리***, 다이* 정도지만 그런 가게들 말이다. 제일 큰 상점은 뭐니 뭐니 해도 하나로마트다.
시끄러울 것도 요란할 것도 없는 그런 조용한 동네가 다른 때와 달리 시끌벅적할 때는 여름휴가철이다.
물이 좋다고 이미 말한 것처럼 물 좋은 계곡에는 피서객들이 많고, 유동인구 가장 많은 하나로마트가 조금 과정 섞어서 발 디딜 틈 없는 유일한 때가 여름이다. 장수에 머무른 5일 동안 3일은 물놀이를 했으니 시원한 물소리 들리는 곳엔 아이들 소리도 같이였다. 폭염이 연일 계속되니 에어컨 덕분에 실내는 시원해도 바깥 열기는 예년보다 더욱 심해졌다. 덥다고 방안에만 있을 아이들이 아니라 발이라도 담가야 했다.
새로 단장한 누리파크의 물놀이터도 가보고, 그 앞의 분수대에서도 놀고, 여름이라고 물놀이장 설치도 해놔서 하루가 다르게 피부가 노릇노릇 익었지만 그래도 제일 좋았던 곳은 방화동 계곡이다.
방화동 계곡은 장수 읍내에서 남원 쪽으로 20분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 장수의 대표적인 여름철 휴가지다. 어릴 땐 주로 친척들, 동네어른들과 화전놀이를 할 때 갔던 덕산 계곡에 갔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곳이 방화동 계곡이다. 덕산 계곡과 연결되어 있어 조금 걷기 시작할 무렵 중학생 때 학교에서 가는 현장체험학습은 덕산에서부터 길을 따라 방화동까지 걸어간 적도 있다. 방화동 물이 그리 좋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고, 경험도 했지만 아이들과는 자주 오지 못했다. 장수 집에서 한참 떨어져 있고 아이들이 어렸기 때문에 갈 엄두를 못 냈지만 이번에는 용기를 내서 왔다.
맨날 보는 게 산이니 그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거제같이 바다로 뻥 뚫린 곳에 살다 보니 시원한 계곡물이 여름이면 그리웠다. 방화동 계곡은 물도 시원하고, 시원스레 뻗은 나무 가 계곡을 따라 울타리를 쳐서 나무 그늘도 시원하다. 발아래는 맑고 깨끗한 정도를 넘어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바윗돌과 자갈돌을 가르며 흐른다.
서늘한 기운에 몸이 부르르 떨려 하늘을 보자면 파란 하늘이 머리 위 높게 펼쳐져 눈부시다. 가끔 지나가는 흰구름이 그늘을 만들어주다가도 금방 걷혀 여름 하늘 뜨거운 햇살이 머리를 데우고, 허벅지 아래 무릎을 넘나들며 몸을 휘청이며 흐르는 세찬 물줄기는 기어지 주저앉게 만든다.
아이들은 물속에서 돌을 주워 물길을 막고 논다. 너른 바위에 앉아 반신욕도 즐긴다. 첨벙첨벙 물살을 가르며 뛰다가 휘청거리고 넘어진다. 두 눈을 크게 부릅떠 다슬기며, 물고기를 찾지만 대체로 눈보다 손이 훨씬 느리다. 하늘을 향해 물을 튕기다가 옆에 있는 엄마로 방향을 전환하여 파닥거리며 물을 뿌려댄다. 물방울 가득한 머리와 얼굴엔 햇빛이 그대로 반짝이며 발갛게 익어가는 여름 계곡. 더워서 시원한 곳.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시원한 물소리에 한번 즐겁고, 그 속이 들여다보이는 깨끗한 물살에 두 번 즐거운 곳에서 여름 한나절 잘 놀고 왔다. 사람들 등살에 몸살을 앓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기껏해야 한 번 오는 이곳에서 잘 놀고 가고 깨끗하게 치우는 것으로 내 몫은 다 했다고 위안 삼는다.
그 흔한 대형마트도 없고, 시내도 5분이면 끝나고, 가장 큰 마트는 하나로마트와 다이소이지만 도시에는 없는 계곡이 있어 어느 고장보다 시원한 내 고향에서 여름 방학을 시작했다. 방학은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