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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04. 2024

우리 반 피터(3)

그게 저절로 될 리 없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매일 아침 출근길 4층 계단을 올라갈 때 보는 동시의 한 구절이다.


가을이 오고 있다. 며칠 사이 아침 햇살이 뜨거워도 머리칼을 날리는 바람이 시원하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교실 안을 가득 채우는 바람 덕분에 상쾌하고 후련했다.

가을이다.

대추, 밤이 나무에서 가을을 담은 빛깔로 충실하게 익어가는 가을이 나는 왠지 두근거렸다.

그런 날이었다. 아침 출근길 시원한 공기를 맞으며 매일 가는 길인데도 설렜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바삐 걷는 아이들 틈으로 바닥을 보며 쏜살같이 교실로 향하다가 문득 하늘을 보았다. 네모난 학교 건물과 철제 담장에 가로막힌 하늘이지만 어디까지 높게 뚫렸을지 모를 광활하게 열린 하늘이었다. 가을이 되자 나의 교실도 열매를 맺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분명 그땐 그랬다.


화요일 아침 활동 시간엔 피터와 라이언킹을 읽었다.

유명한 만화라도 좀 연식이 있어서 아이는 모를 것 같았지만 등장인물이 사자, 하이에나, 멧돼지 같은 동물이라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았다.

전날 해오지 않은 글자 쓰기를 한 번씩 써왔고, 집에서 읽으라고 보내준 책도 가지런히 정리해서 가져왔다.

창문에서 바람이 훅 끼치자 얼굴을 쓰다듬는다. 아침에 부지런히 걸어왔는지 얼굴에 땀이 맺혀있어 휴지를 한 장 건넨 후 책을 펼쳤다.

 

두꺼운 표지를 열자마자 반대로 책을 덮는 아이 손을 피해 책을 위로 당겨서 다시 편다.

책을 열려는 자와 덮으려는 자의 눈치 게임에서 일단 내가 이겼다.

흐린 눈을 하고 있는 아이에게 아기 사자의 탄생과 못된 삼촌의 이야기는 조금 지루했는지도 모른다.

아빠가 죽은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그 때문에 무리에서 도망쳐 새로운 친구들과 하쿠나마타타를 부르며 사는 심바의 모습에 점점 빠져들 때 교실 안의 소란이 웅성거림에서 떠들썩함으로 변했다.


-시끄러워! 아잇!


피터는 카리스마 있는 사자의 포효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저마다의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어 들리지 않았나 보다. 피터와 내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소란스러움에 어쩔 수 없이 데시벨을 조금 높여 나머지 책을 읽었다.

오늘의 단어는 사자와 아기다. 10칸 공책에 반득하게 글자를 쓰고 한 번씩만 써보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자석 글자로 사자, 아기를 보여준 후 챙겨서 책상으로 보냈다. 여기까지 아침 활동 끝.


1교시 국어 수업과 2교시 수학 수업은 글을 쓰고 문제를 생각하며 푸는 것으로 충분했다.

화요일 중간놀이 시간엔 운동장을 가는 날이어서 아이들 모두 종 치기 무섭게 밖으로 나갔다. 교실에 몇 남은 아이들끼리 모여서 수다를 떨고 나도 조금 쉬려고 책상을 정리하는데 피터가 손을 뻗으며 다가온다.


-선생님! 같이 가요!

-운동장 가고 싶어?

-네!

-그래! 같이 가자!


평소 급식소, 체육관에 가는 것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4층에서 1층으로 내려간다. 아이의 리듬감 있는 발걸음에 운동장 가는 길이 훨씬 가까워진 것 같았다.

출근길에 혼자 보던 하늘을 피터와 같이 보았다. 신발장에서 운동장까지 또 올라오는 계단이 있어 꽤 먼 거리지만 벌써 피구, 축구하고 있는 아이들보다 훨씬 느려도 아이는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침보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시원한 바람 덕분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주 오랜만에 시소를 탔다. 구름사다리도 오르고, 철봉을 잡고 버티기도 했다.

피터는 시소를 탈 때 발을 굴러 쿵덕쿵덕 엉덩방아 타기도 좋아했고, 구름사다리 2-3칸에도 무서워했지만 자신이 올라갈 수 있는 높이까지 올라가고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여러 높이의 철봉 중 제일 낮은 철봉을 두 손으로 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놀이에도 재밌어했다.


책을 읽을 때 무관심한 얼굴도 아니고, 피곤해서 두 손을 감싸 쥐지도 않았다. 맑고 환하게, 흐린 하늘도 푸르게 보일만큼 밝게 웃는 녀석 덕분에 운동장에서 고작 십여분이어도 재미있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가고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로 달려가자 나도 피터를 불렀다.


-이제 가야 돼! 과학 시간이야.

-(구름사다리 지지대에 몸을 밀착함)

-피터야! 수업 시작할 시간이야! 가야지!

-세*! 시*! (친구들 이름을 부른다)


전담실로 아이들 보내야 하는데 수업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바위처럼 꼼짝 않는 아이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선생님 이제 교실로 가야 해! 같이 가자!

-싫어요!

-피터야! 수업 시간은 지켜야지!

-(지지대에 다리를 휘감음)


할 수 없이 아이를 두고, 4층 교실로 올라간 후 서둘러 아이들을 과학실로 보냈다. 창밖을 보니 여전히 같은 자세로 혼자 있는 아이를 확인하고, 다시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2층에서 4층, 다시 2층 운동장.

바로 나가지 않고 현관문 바깥을 주시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에서 아이는 교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떤 생각을 하며 그 적막함을 혼자 이겨내는 것일까.

몇 분 후  다시 아이를 불렀다.


-피터야! 이제 가야지!

-(옆으로 천천히 발을 끌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랑 같이 수돗가에서 손 씻자! 아까 시소랑 철봉 했잖아!

-(조금 걸음이 빨라진다.)

-같이 손 씻고 이제 교실로 들어가요.

-네...



학기 초부터 피터는 수업 시간에 교실로 들어오는 것을 힘들어했고, 체육관, 과학실, 급식소 이동할 때마다 느린 걸음 덕분에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다가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이면 제일 늦게 오곤 했다. 말없이 교실 밖으로 나가 보건실에 혼자 가거나, 3층 아는 동생이 있는 교실 앞을 간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복도 옆에 줄지어 있는 소파에 누워있는다.

제시간에 어딘가 가야 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너무 자주, 빈번하게 있다 보니 아이들도 피터가 자리가 없으면 으레 나에게 와서 피터의 현재 위치를 중계해주곤 했다. 친구들이 들어가자고 이끌어도 들어가지 않고 버티다가 수업 시간이 되어 내가 데리러 가면 체념한 듯 교실로 들어오곤 했다.


운동장에 갈 땐 그렇지 않았다.

평소 걸음보다 빨랐고, 보폭이 작아도 영차영차 열심히 뛰어왔다.

아이는 하고 싶은 것을 오래 하고 싶었고, 하기 싫은 것에선 달아나고 싶었을 뿐.  다만 분명한 것은 느려도 반드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애가 타고, 속이 끓고, 안부를 확인해야 안도가 되지만 말이다.

아이와 한판 기싸움을 벌이고, 교실로 들어와 책을 챙겨 과학실로 보내니 수업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렇다. 그게 저절로 될 리 없다.

교실로 들어가기 싫어서

도망가기 몇 번

보건실로 숨기 몇 번

다른 층으로 친구 찾으러 가기 몇 번

그렇게 해야 교실에 오는 발걸음이 가벼워질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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