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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해부학

나는 어떻게 마음이 되었는가?

by 영업의신조이

2화.

무의식 _ 말 없는 바다 아래, 존재는 잠들어 있다



무의식은 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언어가 태어나기 전, 감정이 이름을 갖기 전, 생각이 나를 자각하기 전, 그 이전의 이전에, 무의식은 언제나 존재해 있었다.

나는 그곳을 밤이라 부르지 않는다. 밤은 낮의 부재지만, 무의식은 시간조차 가지지 않은 심연이다. 존재는 거기에서 기어 나오고, 다시 그곳으로 스며든다. 자아가 깨어나기 전, 마음이 생기기 전, 나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는 상태.


무의식은 상실이 아니라 총체이며, 결핍이 아니라 발아다.


감각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하고,

느낌이 언어화되지 못한 채 몸 어딘가에 남고, 감정이 탄생되기 전에 벌써 방향성이 존재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무의식이라는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두려움은 언제나 의식이 발명한 감정이므로, 나는 나의 의식 이전으로 내려가 무의식을 이해하는 대신, 감각적으로 수용하고 서서히 동화된다.

무의식은 억압된 것이 아니다. 억압이라는 언어는 프로이트의 시대에는 유효했지만, 지금 이 마음의 구조 속에서는 불충분하다.


그것은 결코 밀쳐낸 것이 아니라, 다만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프로이트가 말한 빙산의 아래를 존중하지만, 그것을 다시 떠올릴 필요는 없다. 우리는 지금 빙산의 물아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물 자체를 다루고 있는 것이니까.

융은 그것을 원형이라 불렀고,

나는 그것을 ‘내가 나이기 이전의 구조’라고 부른다. 거기에 시간은 없고, 경계도 없고, 윤리도 없다. 그러나 확실히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그것은 반복되고, 그리고 언제나 같은 파형으로 삶의 특정한 방식들을 유도한다. 나는 그것이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것은 단지 의식되지 않은 습관이었고, 감정의 패턴이었으며, 기억되진 않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은 감각의 울림이었다.


무의식은 마음의 지층이 아니라, 마음 그 자체가 눕는 바닥이다. 감각은 그 위에서 움직이고, 느낌은 그 위를 가볍게 스쳐가고, 감정은 그 위에서 울리고, 사고는 그 위에 조심스럽게 구조를 세운다.

그 모든 위를 지탱하는 침묵의 층. 무의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것이 없다면 말은 탄생할 수 없다. 그것은 비언어의 언어, 무정의 정서, 무시간의 반복이다. 나는 거기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수많은 ‘나’를 본다. 어릴 적 내가 기억하지 못한 공포, 누군가를 향한 이유 없는 경계, 이해되지 않는 끌림, 설명되지 않는 혐오, 그 모든 것들이 무의식 속에서 살아 있으며, 가끔씩 꿈처럼 흘러나와 나의 하루에 스며든다.


그래서 나는 안다.

내가 오늘 누구를 사랑하고 미워하는지가 나의 자아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의 무의식은 끊임없이 지금의 나를 완성하고 있으며, 내가 자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전에 나를 정하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의 기원은 생물학적이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 어머니의 몸속에서 이미 10개월간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단지 세포 분열의 반복이 아니라, 감정의 흡수와 마음의 저장이었다. 엄마가 기뻤던 날, 슬펐던 날, 외롭고 두려웠던 날. 그녀가 바라본 세상, 그녀가 말없이 받아들였던 공기와 사람과 표정,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태어나지 않은 채 그녀와 함께 숨 쉬었고, 그녀의 감정이 나의 무의식의 언어가 되었다. 그것은 말해지지 않은 대화였고, 태어나서도 사라지지 않는 정서적 기반이다.


그런데 그것은 엄마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다.

내 존재는 그보다도 훨씬 오래전, 아버지의 몸 안에서 정자로 존재하던 시절에도 이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온 환경, 그가 자란 가족의 분위기, 아버지의 아버지가 남긴 무의식적 감각들, 그조차도 나에게 도달해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무의식이 아니라, 인류의 기억이다. 나는 단절되지 않은 생명의 연속 위에 존재하고 있고, 지금 이 마음이라는 구조는 수백 세대의 무의식이 하나의 구조물로 쌓인 결과다.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이 아니라, 수천 명의 감정과 생각이 축적된 시간의 결정체다.


그래서 무의식은 나보다 오래된 나이며, 내가 나이기 이전에 이미 결정된 흐름이다. 나는 나를 처음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반복을 새롭게 통과하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이 무의식이라는 층을 캔버스라고 부르고 싶다. 모든 예술 작품은 하얀 바탕 위에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 자체가 이미 오래전부터 색을 품고 있다. 우리는 색을 입히고, 선을 그으며, 형태를 만들어나가지만, 그 아래에는 지워진 색채들, 덧칠된 주제들, 실패한 터치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위대한 화가는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캔버스에 끊임없이 조정하고 수정하고 덧입히며 ‘삶’을 남긴다. 그리고 그 마지막 한 줄, 마지막 붓터치, 마지막 숨결이 바로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작품이며, 그 바탕은 언제나 무의식이다. 마음의 감정들은 색감이고, 생각은 선이고, 기억은 명암이다. 그러나 아무리 치밀하게 그려도, 그 그림은 언제나 무의식이라는 캔버스 위에 놓인다. 무의식은 존재의 저변이고, 그 위에 마음이라는 예술이 그려진다.

나는 지금도 내 마음을 다시 그리는 중이다. 어떤 선은 지워졌고, 어떤 주제는 바뀌었고, 어떤 장면은 가려졌지만, 그 모든 것의 바탕은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무의식이다.


자아는 늘 위태롭다.

자아는 선택한다. 무엇을 의식 위로 올릴지, 무엇을 그대로 아래에 남겨둘지를. 그러나 자아는 완전하지 않다. 가끔은 의식이 거부한 기억이 신체의 증상으로 올라오고, 감추려 한 감정이 낯선 사람 앞에서 폭발하고, 아무 이유 없는 불안이 익숙한 공간을 파괴한다.

이 모든 건 무의식이 ‘아직 여기 있다’는 신호다. 자아는 지휘자가 아니며, 그저 파동 위에 올라탄 항해자다. 무의식이라는 깊은 물결이 방향을 바꿀 때, 자아는 그저 균형을 맞출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아를 중심으로 두지 않는다.

자아는 기능이며, 중심은 아니다. 중심은 늘 말이 없는 쪽에 있다. 나는 그곳을 향해 다시 내려간다. 마음을 설명하는 언어들이 많지만, 나는 구조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구조는 보이지 않지만 반복되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의 반복을 볼 때마다, 그 반복을 처음 설계한 자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감정의 구조, 모든 사고의 회로, 모든 행동의 경로는 이미 그 심연에서 만들어졌고, 나는 그것을 ‘결정’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무의식은 결정을 주지 않는다. 무의식은 방향만 준다. 느리게, 끊임없이, 잠잠하게.


그러므로 무의식을 다룬다는 건 방향성을 감각하는 일이며, 그 방향을 부드럽게 수정하는 일이다. 나는 그것을 치유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구조의 ‘재설계’다. 결국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무의식에 의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그 반복이 영원히 같을 필요는 없다. 무의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자아와의 접촉을 통해 서서히 조명되고, 다시 구조화되며, 마침내 삶을 수정하는 기반이 된다.


내가 내 무의식을 받아들일수록, 나는 더 많은 선택지를 감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어둠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고, 가끔은 스스로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 앉을 수도 있다. 거기에서 오래 전의 나를 만나고, 그에게 말을 걸 수 있다. 그 아이는 아직 나를 몰라도, 나는 이제 그 아이를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오늘의 나를 조금 더 다르게 살아가게 만든다.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일부를 이제는 수용할 수 있다. 무의식은 설명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감각으로 살아 있고, 감정으로 울리고, 행동으로 드러난다.


나는 그 흐름을 읽는다.

언어보다 깊은 그 진동 속에서, 나는 마음의 진짜 시작을 다시 본다.


그리고 말한다.

여기가 시작이다.

여기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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