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마음이 되었는가?
3화.
잠재의식 _ 흐릿한 경계, 떠오르지 않지만 머무는 것들
잠재의식은 무의식과 의식 사이,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은 반투명한 수면 위에 떠 있다. 그것은 의식되지 않았으나 결코 사라지지 않았고, 무의식의 어둠에 가라앉았으나 언제든 떠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중간지대다.
나는 이 영역을 가리켜,
‘기억되지 않은 기억들’이라고 부른다. 분명히 나의 일부였지만, 내가 그것을 기억했다는 증거는 없고, 그렇다고 잊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의 나를 구성하지만, 내가 나를 설명할 때는 빠져 있는 조용한 힘이다.
잠재의식은 무의식처럼 완전히 가려져 있지도 않고, 의식처럼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것은 낮과 밤의 경계에 머무는 새벽빛처럼,
혹은 수면 위로 솟기 직전의 기포처럼,
항상 곁에 있지만 항상 말은 없다.
나는 종종 어떤 장면을 보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이유 없는 익숙함이나 불편함을 느낀다. 그것은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며,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다. 그리고 그 안에 잠재의식이 있다. 그것은 한 번도 기억된 적 없지만, 결코 새로운 것도 아닌 정서적 흔적이다. 잠재의식은 그렇게 감각의 문턱에서 살아 있다.
나는 잠재의식을 무의식의 한 겹 위에 놓인 얇은 막이라고 생각한다. 이 막은 감각에 의해 건드려지고, 감정에 의해 진동하며, 때로는 꿈이라는 통로를 통해 현실로 올라온다. 그것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우리의 반응과 행동을 은밀하게 조율한다.
잠재의식은 피아노의 댐퍼 페달과도 같다.
피아노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다. 건반을 치면 소리가 나는데, 페달을 밟으면 그 소리가 훨씬 오래 이어지고, 방 안 가득 울려 퍼진다. 심지어 건드리지 않은 줄마저 함께 울려 공기가 달라진다. 반대로 페달을 떼면 소리는 금방 끊기고 잔향이 사라진다. 페달 자체는 소리를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소리가 어떻게 이어지고 어떤 울림을 남길지 결정한다.
잠재의식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직접 말을 하거나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우리의 반응 전체를 길게 울려 퍼지게 하거나 갑자기 끊어지게 만든다. 그것은 배경의 힘이고, 여운의 색이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를 한참이 지나서야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잠재의식은 설명되지 않은 동기들의 저장소이며, 언제든 의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턱'이다.
잠재의식의 기원은 단순한 심리적 축적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전이와 경험적 누적이 함께 만들어낸, 다층적 저장 구조다. 유아기 시절의 촉감, 냄새, 공간의 온도처럼 명확한 기억으로 인식되지 않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뚜렷한 감정 반응을 유발하는 요소들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향기에 갑자기 불안해진다면, 그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장면이 잠재의식 속에서 되살아난 결과일 수 있다. 기억은 없지만, 감각은 반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반응을 통해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여전히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겨울날,
교실 구석에서 외투를 던지며 화를 낸 친구를 본 적이 있다. 아무도 그 아이를 자극하지 않았고, 분위기 역시 평온했지만, 그 순간 그의 얼굴은 분노와 두려움으로 뒤섞여 있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아이는 전날 밤 아버지의 술주정과 소리를 듣고 잠들었고, 그때 느꼈던 긴장이 그대로 잠재되어 있다가, 교실의 어떤 소리와 어딘가 닮은 선생님의 억양에 의해 갑자기 반응했던 것이다. 그는 의식하지 못한 채, 이미 과거의 기억으로 감정적 재현을 겪고 있었고, 그 반응은 누가 봐도 과도했지만, 사실은 정확히 그의 몸에 저장된 과거의 재생이었다.
잠재의식은 무의식처럼 깊지 않고, 의식처럼 가볍지 않다. 그것은 상처와 회복의 중간에 존재하며, 감추고 싶지만 완전히 숨겨지지 않는 정서들의 작은 방이다.
나는 때로 이 공간이 예술적 창조의 자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창작은 완전히 의식적인 기술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왜 이 색을, 이 단어를, 이 장면을 선택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잠재의식이 스며든 결과물 속에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잠재의식을 통해 말하고, 화가는 그 속에서 선을 긋는다. 예술은 언제나 잠재의식의 언어로 말한다.
어느 여름날 오후,
나는 문득 한 편의 시를 쓰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매미가 울고 있었고, 그 울음소리가 이상하게 가슴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불안을 토대로 한 연을 썼고, 그 문장들이 스스로 펼쳐졌다. 다 쓰고 나서야 알았다. 유년 시절, 나는 여름이면 종종 혼자 방에 남겨졌고, 문 밖으로 들리는 매미 소리만이 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의 고요함이 외로움이었다는 걸 말로 하지 못한 채 지나왔는데, 그 정서가 시의 리듬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잠재의식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잠재의식을 물감에 비유한다.
무의식이 캔버스라면, 잠재의식은 그 위에 한 번쯤 깔렸다가 덧칠되어 숨겨진 밑색이다. 화가는 완성된 그림 위에 또 다른 레이어를 입히지만, 그 밑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어떤 감정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전체 분위기를 좌우하고, 어떤 기억은 잊혔지만 여전히 감정의 농도를 결정한다. 잠재의식은 마음이라는 작품을 만드는 색의 톤이며, 정서를 지배하는 온도다. 우리는 그 색을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느낀다.
잠재의식은 또한 성장의 열쇠다.
의식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부분만 다룬다. 그러나 진짜 변화는, 잠재의식의 내용이 의식으로 전환될 때 일어난다. 나는 왜 그 말을 들으면 움츠러드는지, 왜 어떤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지, 왜 반복적으로 같은 선택을 하는지. 그 질문의 해답은 의식 안에 없다.
우리는 잠재의식을 마주할 때 비로소 자신을 넘어설 수 있다. 그것은 나를 방해하는 그림자가 아니라, 나를 이끄는 원형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더 깊은 자기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잠재의식을 '기억을 기다리는 감정'이라 부른다. 아직 언어화되지 않았고, 아직 얼굴을 갖지 못했지만, 나를 향해 조용히 손을 뻗고 있는 감정. 우리는 그 손을 잡을 때, 자신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계단을 오르게 된다.
마음의 구조 속에서 잠재의식은 중추적이다.
그것은 아래로는 무의식과 닿아 있고, 위로는 의식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흐름을 따라 걷는다. 그리고 걸을수록, 나는 더 많은 나를 기억하지 않으면서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잠재의식의 방식이다.
흐릿하지만 확실한 나의 한 겹.
나는 이제 안다. 말하지 않았던 감정이 나를 움직이고 있었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장면이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마음의 구조 속에서 ‘잠재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었음을. 그것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떠오르고 있는 나의 일부다. 나는 그 빛을 따라, 더 깊은 나로 향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