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의지와 실천으로 다시 쓰는 마음의 구조
29화.
빌런의 얼굴을 한 스승들에 대하여
살다 보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바람이 차가워도 옷을 더 껴입으면 되고, 일이 많아도 밤을 새우면 어느 정도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앞에 서 있는 누군가가 반복해서 나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고, 나를 작게 만들고, 나를 지치게 만들 때, 마음은 옷도 방패도 안전모도 없이 맨몸으로 그 사람을 맞이해야 한다. 그래서 환경의 고난보다 결국 사람의 고난이 더 깊게 남는다. 오늘은 그 사람들에 대해, 우리 인생에 등장한 수많은 ‘빌런’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세상에는 낮과 밤이 있다. 밀물과 썰물이 있고, 봄·여름·가을·겨울이 차례로 돌아온다. 자연은 언제나 빛과 어둠, 밀려옴과 물러남, 피어남과 스러짐이 짝을 이루며 존재한다.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나에게 빛 같은 역할을 하고, 또 누군가는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두 가지가 모두 합쳐져야 하나의 인생이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내 삶의 영화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면, 이 80억 인구 중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악역을 맡아야 한다. 아무도 악역을 맡지 않는 영화는 존재할 수 없고, 아무런 저항도 배신도 시기와 질투도 경험하지 않는 주인공은 성장할 수 없다. 그러니 내 인생에 등장한 빌런들은 사실 내 서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어딘가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들어온 조연들이다.
빌런의 역할은 단순하지 않다. 그들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내 마음을 쥐어짜고,, 내 자존심을 긁고, 내가 숨겨 두었던 불안과 열등감과 분노를 끌어올린다. 그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 묻게 된다. 나는 왜 이렇게 이 사람에게 흔들리는가, 왜 이 사람의 말과 행동이 이렇게까지 나를 무너뜨리는가. 이 질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빌런은 결국 나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내가 끝내 외면하고 싶었던 내 모습, 내 욕망, 내 열등감, 내 상처를 대신 연기해 주는 사람들이다. 나는 “나는 저렇게 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지만, 그 말을 그렇게 강하게 내뱉을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내 깊은 곳 어딘가에 이미 그 가능성이 숨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넷플릭스 드라마나 영화, 애니메이션을 떠올려 보아도 그렇다. 공통점은 단순하다. 주인공이 기승전결의 ‘전’까지 어마어마한 고난과 역경을 통과한다는 점이다. 배신과 실패와 오해, 죽을 고비와 절망의 나락, 끝도 없이 이어지는 터널의 장면들. 관객은 숨이 막히면서도 그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다. 왜냐하면 터널이 어둡고 길수록 마지막 장면의 빛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사의 진폭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엔딩에서 더 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 구조를 내 인생에 그대로 가져와 보면 답은 명확해진다. 내가 진심으로 행복한 엔딩을 원하는 주인공이라면, 그 엔딩을 지탱해 줄 만큼의 고난과 빌런이 필요조건으로 따라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고난이 깊을수록, 빌런의 수위가 높을수록 내 인생 서사의 스케일 역시 커질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그렇다고 해서 추상적인 말만으로 빌런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하나 꺼내 본다.
어느 날 나는 회사를 이직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상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말 그대로 질 나쁜 보스였다. 술을 유난히 좋아했고,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거기까지 라면 그냥 술 좋아하는 사람이겠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밤새 술을 마신 다음 날이면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지각은 기본이었고, 아무 말 없이 스케줄을 펑크 내기도 했으며,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아이들의 건강을 핑계 삼아 결근하기도 했다. 대표와 사장 앞에서는 꼼짝 못 하면서, 밑에 있는 직원들에게는 함부로 대하고 권위를 휘두르며 책임은 떠넘기고 공은 가로챘다.
나는 매일 아침 회사에 가는 길이 지옥 같았다. 에너지가 바닥까지 꺼진 상태에서 억지로 계단을 오르던 그 발걸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끝이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가 있지? 어떻게 저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지?” 그런데 어느 날, 그 미움의 밑바닥을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 사람 자체를 욕하기보다, 그를 바라보는 내 감정을 관찰해 보고 싶었다.
그러자 한 가지 사실이 서서히 떠올랐다. 나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단지 건강 때문에, 간이 상해서 더 이상 마음껏 마실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내 안에는 “나도 마음껏 마시고 싶다”는 욕망과 “그래도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함께 살고 있었다. 또 하나, 나도 가끔은 회사에 가기 싫었다. 지친 몸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날에도 나는 어떻게든 출근했다. “그래도 해야지, 그래도 지켜야지, 그래도 버텨야지”라는 책임감과 도덕심 때문에 한 번도 펑크를 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내 앞에 있는 상사는 내가 절대 넘지 못하도록 스스로 붙잡고 있던 이 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낌 없이 넘나들고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고 싶으면 마셨고, 쉬고 싶으면 쉬었으며, 지각하고 싶으면 지각했다. 내가 마음 깊이 눌러 두었던 욕망들, “나도 한 번쯤은 그렇게 살고 싶은데”라고 중얼거렸던 그 작은 소망들을 그는 죄책감도 없이 노골적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분노했다.
그러나 그 분노 속에는 부러움과 질투, 억울함도 섞여 있었다. “나는 나를 그렇게까지 풀어주지 않는데, 너는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네 욕망을 풀어놓고 사느냐”라는 감정이었다. 결국 나는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를 미워했던 이유 중 상당 부분은 그가 내 안에 깊이 눌러 둔 욕망을 너무 적나라하게 연기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나의 가장 부끄러운 욕망과 나의 가장 치열한 책임감을 동시에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하자 그 상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그의 행동은 문제였고, 여전히 회사에 피해를 주었으며, 여전히 그가 옳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 마음 안에서는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나는 그를 단순히 “나쁜 인간”이라고 잘라 버리는 대신, “내가 되지 않기로 선택한 모습”이자 동시에 “내 안에 숨어 있었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역할로 보기 시작했다. 그는 나의 윤리와 책임감의 기준을 더 분명하게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동시에 내가 스스로를 얼마나 옥죄며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서 배우기로 했다.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다. 그러나 내 안의 욕망과 피로와 쉼에 대한 갈망은 더 정직하게 돌보겠다. 이것이 그로부터 내가 얻은 결론이었다. 최악의 상사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강력한 스승이 되어 버린 셈이다.
이 경험을 기준으로 삼고 보면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얼굴의 빌런들이 있다. 내 뒤에서 말을 바꾸는 동료, 필요할 때만 다가와 이용하고 떠나는 사람, 끊임없이 비교하고 깎아내리는 친척, 만날 때마다 나를 죄책감 속으로 밀어 넣는 가족. 이 사람들은 분명 나를 지치게 하고 상처를 남기며 어떤 날은 울음을 터뜨리게도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다. 어디까지가 나의 경계인지, 어떤 말과 행동은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어떻게 두어야 내가 무너지지 않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지가 무엇인지.
좋은 멘토와 스승들이 나에게 방향을 알려 준다면, 빌런들은 나에게 “이 길은 아니다”라는 강력한 표지판을 세워 준다.
그 표지판이 없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방심하고, 너무 안일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큰 낭떠러지에 떨어질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선을 하나 분명히 그어야 한다.
빌런이 나를 성장시킨다는 이유로 폭력이나 가스라이팅, 학대와 착취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상처는 상처이고, 부당한 것은 부당한 것이다. 누군가의 행동이 나의 존엄을 지속적으로 무너뜨리고 안전을 침해하며 삶 전체를 마비시키는 수준에 이른다면, 그때는 “의미 부여”가 아니라 “거리 두기”와 “탈출”이 먼저다.
필요하다면 도움을 요청해야 하고,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상처와 이미 겪어 버린 고난을 내 인생의 서사 안에서 어떻게 다시 의미화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의미화를 통해 나는 희생자가 아니라 주인공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빌런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왜 내 인생에 이런 사람이 등장했을까?”라는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내 영화의 어느 장면을 찍고 있는가, 이 사람은 이 장면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라고.
그리고 또 하나,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어떤 내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갔을까”라고. 어떤 빌런은 내 분노를 보여 주는 거울이고, 어떤 빌런은 내 열등감을 드러내는 거울이며, 어떤 빌런은 내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욕망을 들춰내는 거울이다.
거울이 없으면 얼굴을 고칠 수 없듯, 빌런이 없다면 내 마음의 얼굴을 고칠 기회도 줄어든다. 물론 그 과정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고통이 전부는 아니다. 그 고통을 통해 나는 나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게 되고, 조금 더 단단해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한 가지 특이한 감정이 생긴다. 여전히 그들을 곁에 두고 싶지는 않지만, 완전히 미워만 할 수는 없는 묘한 감정이다. 나는 그들을 떠나보내되 한 구석에서 작은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네가 해 준 역할은 여기까지다. 나는 이제 다음 장으로 넘어가겠다.”
이 정도의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빌런은 내 인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 끝낸 것이다. 그 지점이야말로 이 마음의 공부를 끝까지 읽어 낸 사람, 『마음 해부학』 한 권을 온전히 통과한 사람이 받는 일종의 졸업장일지도 모른다.
내 인생은 넷플릭스의 어느 드라마보다 입체적인 한 편의 이야기다. 나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고, 내가 겪어 온 수많은 빛과 그림자, 스승과 빌런, 사랑과 상처는 모두 이 이야기의 장면들이다. 어떤 날은 화려한 클로즈업이 주어지고, 어떤 날은 비를 맞으며 구르는 롱테이크가 이어진다. 빌런은 언제나 어딘가에서 나를 시험하고, 동시에 나를 키워 낸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으려 한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이 일을 통과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고 싶다.
결국 빌런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를 괴롭히던 타인의 얼굴 뒤에서 조용히 떨고 있던 내 마음의 그림자를 끝내 외면하지 않고 마주 보겠다는 결심이다.
“당신 인생의 빌런은 누구인가?”
“그가 드러내 준 내 그림자는 무엇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