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조카딸 정후에게-
폭염이 한풀 꺾인 9월 28일 토요일 오후 3시.
용산구청 주변에 있는 B. 하우스에서 조카딸 정후의 결혼식이 있었다.
'스드메'라 양가 친척이 모일 장소로 너무 좁지 않을까 살짝 걱정을 했다. 기우였다. 꼭 축하해 줄 사람들로만 모인 느낌! 부산스럽고 어지럽지 않아 결혼식의 신성한 장소로 부족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부는 사랑스럽게 어여쁘고 신랑은 훤칠하니 잘 생겨서 새로운 부부의 탄생이 환한 가을 날씨처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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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결혼한 조카딸은 우리 막내의 장녀다. 막내 이야기는 <권가네 이야기>에서 자세히 쓴 적이 있다. 평범하게 대학을 다니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는 경우에 대해서였다. 막내는 우리 오 남매 중 가장 치열하게 삶의 시련을 겪었지만 그걸 온몸으로 이겨낸 사람이다. 정후는 그런 막내 동생의 딸이다. 당연히 살아가며 생기는 어려움이 앞에서 누구보다 의연하고 지혜로운 아이였다.
정후 어린 시절은 다른 아이들보다 외로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정후는 사학재단 이사장이신 분이 외할아버지인 데다 그 집안의 첫 손녀였기에 외가에서도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도 엄혹한 정치 환경의 영향을 받은 부모의 남다른 삶 때문에 외로운 환경은 어쩔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동생 부부는 정권이 몇 번 바뀌고야 뒤늦게 퇴학당한 학교에 복학했다. 동생은 졸업 뒤 생계를 위해 가스공사에 다니면서도 공부를 계속, 행정고시에 합격해 노동부에 입사했다. 동생은 노동 현장에서 일하다 학업을 마치기 위해 돌아온 뒤에도 늘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공무원으로 노동자들을 측면 지원하고 싶다는 게 막내의 뜻이었다.
막내는 청사와 집이 있는 과천에 근무하는 날보다 지방 근무를 전전했다. 아직 어린 딸과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게다가 제 엄마도 대학원에 진학. 미대에서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바람에 조카딸은 화성에 계신 우리 부모님께 꽤 많은 시간 맡겨져야 했다.
우리 식구는 부모님을 뵈러 매주 화성을 드나들었다. 정후는 그런 연유로 특별히 우리 가족과 자주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유독 정후 어린 시절 사진 속에 내 아들 둘이 함께 찍혀 있는 이유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내내 동영상 속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내가 기억하는 정후의 모습이 스르르 스쳐갔다.
정후는 엄마의 뒤늦은 공부와 아빠의 직업 때문에 다소 외로운 시간도 잘 견뎌내고 건축과로 진학했다. 지금은 건축사무소의 설계사며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다. 조각을 전공한 제 엄마의 소질을 물려받은 데다 재능에 더해 노력도 기울이더니 설계사무소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모양이다. 분명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을 뛰어넘는 훌륭하고 멋진 건축가로 성장할 것임을 가족들은 모두 기대하고 있다. 물론 건축가 정후가 지은 건물을 볼 날도 역시 고대하고 있다.
내가 늘 정후에게 바란 건 딱 하나! 정후의 행복이다. 결혼식날도 신랑에게 정후와 꼭 행복하게 살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었다.
나마저 이런 마음인데 이미 5년 전 고인이 되신 친할머니와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두 분은 얼마나 대견하실까 싶다. 아니 자랑스러우실 것이다.
결혼식은 소박하고 작지만 품위 있고 아름답게 진행되었다.
화장이 지워질까 봐 눈에 눈물이 내내 그렁그렁한 신부는 제 엄마 아빠 앞에 인사를 하러 가더니 눈물을 흘리는 부모를 보며 결국 울고 말았다. 그렇게 씩씩하게 결혼식의 디테일한 모든 걸 혼자 준비하더니. 결혼식의 1부터 100까지 하나하나 챙기는 걸 보고 정말 놀랐다.
정후야! 우리 가족은 모두 너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원한단다. 살면서 매일매일 행복한 일만 넘치는 건 아니란다. 분명 시련도 고난도 있어. 하지만 지금까지 네가 걸어온 길처럼 씩씩하고 의연하게 살아갈 것을 우리 모두 응원한다는 걸 잊지 말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