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은 셈 치기 기법

독일 장애인 여행 캠프에 워커로 가다(11)

by 반하의 수필

캠프의 마지막 날 아침, 워커들은 저마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마주치고 흩어졌다. 얼마 되지 않는 내 짐을 싸고 매일 아침 인사를 하던 방으로 간다. 소피에게 받아온 커다란 회색 봉지를 비어기트 할머니, 비키, 야스민에게 건넨다. “빨래할 옷은 여기에 담으세요!” 움직임이 영 시원치 않은 야스민의 캐리어를 열어 수북이 담긴 일주일 치 빨래를 할 그들의 보호자를 생각하며 짐 싸기에 열중한다. 구석에 박혀있던 쓰레기 더미를 처리하고, 화장실의 휴지통을 비우고, 끼웠던 매트리스 커버를 벗겼다. 어제 구워둔 시금치 페이스트리와 통밀빵, 과일, 남은 치즈와 햄 따위를 챙기고 오이와 당근도 잘라 통에 넣는다. 봉고차 트렁크에 차곡차곡 짐이 실리고 사람들도 하나둘 탑승한다.


“자이트 에어 알레 안게슈날테트?! (다들 안전띠 맸어요?)” 뒷자리로 몸을 돌려 지난 일주일간 익숙해진 그 말을 우렁차게 외친다. 차는 출발하고 곧 아기자기한 마을을 빠져나가 독일의 너른 들판을 달린다. 차가 흔들리는 만큼 힘주어 일기장과 펜을 쥔다. 종이 위에 열여덟 명의 얼굴과 그들이 자주 하던 말, 기억 나는 모든 독일어와 한글 뜻을 줄줄이 적어 내린다. 페인트가 쏟아지듯 한 바닥이 금세 빼곡히 찬다.


소피가 운전할 때 즐겨 먹는 커다란 견과류 봉지가 바닥을 보일 때쯤, 무어나우에 있는 쿤터분트 사무실에 도착했다. 참가자들을 데리러 온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나이가 많은 편인 후베아트와 비어기트 앞에는 시설에서 온 듯 회사 이름이 있는 차량에서 옷을 조금은 차려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반면 마리우스나 비키처럼 비교적 젊은 편의 참가자들을 데리러 오는 건 그들의 부모님으로 보였다. 일주일 동안 내 손을 잡았던 후베아트는 키 큰 아저씨의 손을 잡았다. 밝은 목소리로 잘 가라고 인사하고 아쉬운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첫째 날과 마찬가지로 갈색 토끼 인형을 손에 쥔 비어기트 할머니는 나를 안아주며 자신이 인스브루크에 산다며 놀러 오라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는 그의 연락처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들의 일상을 하나도 상상할 수 없어 기분이 이상했다. 정들었지만 사실 여전히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눈물을 참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주차장이 늦저녁의 학교 운동장처럼 텅 비고 소피는 사무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지하실에서 짐 정리를 시작했다. 나와 티나는 몇 분 남지 않은 기차 시간을 기다렸다. 소피와 인사를 하지 못하고 헤어질까 봐 불안했다.


남은 시간이 5분이 되고 3분이 되고 1분이 되었지만, 소피는 나타나지 않고 나는 그녀를 찾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기차역으로 가는 베라의 차가 아쉬움 없이 사무실을 떠나고 그때 난 누구의 얼굴도 쳐다볼 수 없었다. 소피와 이런 헤어짐이라니, 화가 날 만큼 슬펐기 때문이다. 식당에 갔던 날 눈물을 참느라 하지 못한 허그를 하고, 일기장에 써놓은 편지 같은 말도 하고, 에어드롭으로 사진도 보내주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지고싶은 바람이 전부 물거품이 되었다.


골목 하나를 지났을 때 베라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약간 놀란 듯한 소피의 목소리가 스피커폰으로 들려온다. “하리, 티나! 이미 간 거야? 내가 시간을 못 봤어. 인사도 못해서 미안해. 이렇게 얼렁뚱땅 헤어지니까 금방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수고했어.” 그의 목소리에 “네, 안녕.”이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베라의 차에서 내리고 티나와 같은 기차를 탔다. 차창 밖 풍경이 빠르게 지나고 해가 저문다. 또 다른 기차에 몸을 싣는다. 여전히 소피 생각을 하면 눈물이 흐른다. 그를 동경했고,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나 이상으로 열심히 일했고 너무 힘들 때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도 그녀에게 의미 있는 존재였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이런 헤어짐이라니, 소피에게 난 책임져야 하는 어린 외국인에 불과했던 걸까? 마지막 만찬도, 허그도 고맙다는 말도 없이 쓸모를 다 해 버린 기분이다. 소피도 너무 지쳐서 그랬을 거야, 하며 나를 타이르고 위로한다.


오래고 소중한 우정이 절벽 끝에 있던 시절이었다. 표현과 감정을 잃은 듯 창백했던 친구 앞에서 “넌 나랑 친구를 계속할 생각도 없는 거니?”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서운함이 커졌고 나도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은 “넌 나에게 정말 소중한 친구야.”라는 말을 듣는 거였다. 그것만 한 번 들으면, 그의 표현 방식이 어떻든 상태가 어떻든 이해하고 기다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내가 찾은 방법이 ‘들은 셈 치기’였다. “넌 나에게 정말 소중한 친구야.” 그 말을 들어 괜찮아질 마음이라면, 우선 그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 상상이든 착각이든 그렇게 해버리자. 그러자 놀랍게도 성가신 두통이 가라앉고 마음이 커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조금 더 오래, 정말로 그 친구에게 그 말을 들을 때까지 친구를 애정하는 마음을 간직할 수 있었다.


또 한 번 그 방법이 필요한 순간이다. 소피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해 이렇게나 마음이 아프다면, 이런 건 그냥 들은 셈 쳐야 한다. 소피가 내 앞에 있다면, 그는 내가 원하는 말을 해주었을 테니까. “하리야, 열심히 해줘서 고마워. 잘 했어.”


자꾸만 허망하다고 느끼는 내게 말한다. 이렇게 울만큼 좋아한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고 내가 이 경험을 해서 좋았다고. 나는 소피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일한 게 아니냐고. 일기장 앞 페이지에는 POWER IS HERE이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것이 늘 모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제야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미래는 늘 현재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현재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힘은 나에게 있다. 당장에 보이지 않아도, 내가 마음을 다했다면 그만큼의 연결된 미래가 앞에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 된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기차에서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코가 빨간 여자 애는 그렇게 과거에도 갔다가 미래에도 갔다가 현재 자신에게 있는 힘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알아야 할 건 알고 있으니까, 다 울고 나면 괜찮을 것이다. 정든 마음도 서운한 마음도 가볍게 마를 일만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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