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정거장 옆에 유럽이 있었네?

어둑한 독일 겨울 나는 법

by 반하의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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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도 어둡고 오후에도 어둡다. 밤에는 깜깜하다. 어둑한 아침에 오전 수업에 갔다가 점심을 먹고 방에 들어왔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이미 밤인 듯 창밖은 검다. 시간을 보니 오후 네 시다. 당황스러움에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낸다.


오늘 낮이 없었어.

뭐지 이거? 너무 어두운데. 갑자기 너무 슬퍼.

내 하루가 줄었어.

답장을 보니 그들도 비슷한 상황인 듯하다. 독일의 가을과 겨울은 많은 날이 이런 식이다. 한국이라면 늦게까지 번쩍이는 거리에 해가 빨리 지는 줄도 모르거나 북적이는 카페에서 어둠을 피할 수 있지만, 이 독일의 작은 마을에는 저녁 시간 이후에 문을 여는 카페가 없다. 그림을 그리는 숙제도, 독일어를 써야 하는 숙제도, 영어로 하는 숙제도 있지만 방은 너무 조용하고 어둡다. 따뜻한 핫초코 한 잔 마실 수 있는, 밝고 따뜻한 곳이 있다면 이 어둠과 고요도 즐길 수 있을 텐데. 왜 독일인들이 핼러윈이 오기도 전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을 꺼내어 놓는지, 목이 빠지게 크리스마스 마켓을 기다리는지 백번 이해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있다면 저녁에 이렇게 심심하게 갈 곳이 없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10월 말이니 그것은 한 달 후에서나 이야기이다.


작은 가방에 애정하는 책과 밑줄을 그을 연필 한 자루를 챙겨 시원하고 눅눅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밤 산책을 떠난다. 아, 밤이 아니라 오후 6시 반쯤 되었을 뿐이다. 오늘은 익숙한 동네 대신 슈투트가르트 반대 방향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아직 모름. 덜커덩 소리를 내는 밝은 열차가 껌껌한 숲길과 드문드문 불이 켜진 마을을 지난다. “이번 역은 마바흐입니다. 내리시는 문은 오른쪽…” 또렷한 남성 목소리의 기계음이 나오고 열차의 문이 열리자, 마바흐라는 제법 큰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나도 그들을 따라 내렸다. 목적지는 아직도 모름. 지루한 저녁이 조금 흥미로워진다. 도로를 따라 어두운 길을 걷다 보니 구글맵에 노란색으로 표시된 올드 타운이 등장한다. 붉은 나뭇잎들을 구경하며 오르막을 조금 오르자, 나는 홀린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조용한 밤거리에 차만 몇 대 지나던 곳이 한순간에 유럽식 사극에 도착한 듯 보인다. 독일의 전통적인 목조주택과 담쟁이로 쌓여 있는 집들이 나타난다. 빵집이나 카페, 서점, 안경점 등 상점들이 다 문을 닫힌 했지만 길의 중심에 있는 높은 성당이나 종이 있는 첨탑은 여느 유명 관광지 같다. 말굽 소리가 들리고 고전적인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날 것처럼 고즈넉한 유럽 마을이었다. 열차를 타고 가보지 않은 곳으로 단 세 정거장을 왔을 뿐인데 갑자기 유럽 여행에 온 것 같았다. 누구도 추천해 준 적 없던 곳이었기에 내 방 바로 옆에 있던 보물을 찾아낸 듯 기뻤다. 불 켜진 집들을 보았다. 창이 넓게 펼쳐진 집 안으로 벽난로와 어린 여자아이 두 명이 보인다. 무척 포근하고 따뜻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을 것 같은 집이다. 갓 구운 쿠키 냄새를 상상하며 숨을 들이쉬자 젖은 낙엽 냄새가 난다. 가로등에 돌의 물기가 빛나는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내리막길을 걷다 보니 테이블마다 작은 초가 은은하게 빛나는 식당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구글맵으로 그곳에 디저트로 초콜릿케이크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


나무로 장식된 유리문을 열자, 낮은음의 종소리가 부드럽게 퍼진다. 정장 차림의 젊은 남자가 친절하게 인사하고, 나는 묻는다. “혹시 케이크 한 조각만 주문해도 될까요?” 그는 당연하다는 듯 자리로 안내했다. 식당에는 창가에 앉은 단 한 팀밖에 없어서 나도 네 사람은 앉을 만한 크기의 테이블을 차지했다. 한국의 오래된 맥줏집에 있을법한 벽에 붙어 있는 딱딱한 소파 자리인데, 벽 부분은 와인색이고 의자 부분은 다양한 톤의 갈색이 줄무늬 모양으로 섞여 있다. 흰 우유 거품에 초코 가루가 뿌려진 핫초코 한 잔을 다 마셨을 때쯤 휘핑크림과 초콜릿 무스, 베이킹파우더로 화려하게 꾸며진 꾸덕한 초콜릿 케이크가 테이블에 놓인 노란 꽃 한 송이 앞에 도착했다. 어느새 밤 아홉 시가 되었다. 음악 소리도, 창밖에서 울려 퍼지는 도시의 소음도 없이 오직 이 레스토랑의 두 아주머니의 독일어 수다 소리만 들린다. 이곳에서는 외롭지 않다.


다소 사치스러운 케이크 한 조각과 홀로 읽을 수 있는 책, 내 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찾은 여행 같은 곳. 스르르 한 걸음을 돌아서니 펼쳐진 어느 저녁의 고요한 유럽 마을. 그곳에서 모국어로 읽는 책은 어디에서든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충분한 거처가 된다. 나 너머의 나를 잊지 않게 하는 그 언어를 혀 밑에서 돌돌 굴리다 따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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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잠자리에서 거절의 편지를 썼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너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지만 우리는 당분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묵직한 깃털 자루와 축축한 풀과 숲의 습기를 막아내지 못하는 엷은 벽을 가진 헛간과도 같은 이 집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고, 우리를 떨게 하는 이 추위로부터 잠시라도 달아나고 싶지 않다고,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글쓰기의 상태를 중단하고 싶지 않다고, 그러나 내가 너를 만나고 싶지 않은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나는 결코 누설할 수가 없으므로, 이 집과 장소와 고독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고.

작별들 순간들, 배수아, 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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