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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떡 May 17. 2024

편안함과 긴장감 그 사이의 어딘가

2023년 12월 16일 ~ 17일

미국에서의 첫 주말.

드디어 친구가 하루종일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다.

평소 친구의 수영 실력을 흠모하던 나는 친구에게 수영하러 가자며 아침부터 갖가지 공세를 했고, 그녀는 나의 간절함에 마음이 동했는지 흔쾌히 나를 수영장에 데려가 주었다. 


어제의 '그리스 신전' 헬스장은 샌프란시스코 시내에만 해도 지점이 여러 개였는데(알고 보니 미국 전역에 있었다. 심지어 뉴욕에도!), 우리가 갔던 지점은 주말에 문을 닫아서 이번에는 다른 지점으로 가게 되었다. 기존의 헬스장보다 가격이 조금 더 비싸지만 수영장 시설이 월등히! 더 좋았다. 락스 냄새 안 나는 해수풀인 데다가 물 온도도 적당했다. '이게 수영장이지'하며 행복하게 유영하던 중, 어제 얼음장 같던 수영장에서 만난 미남이 문득 생각났다. 미남 총각…. 천만 분의 일의 확률로 혹시 지금 내 글을 읽고 있다면 그때 그 지점 말고 여기로 다녀. 여기가 훨씬 수영하기 좋아…….


나의 친구는 10대 시절부터 각종 수영 대회의 상을 휩쓴 실력자답게 정말이지 아름다운 영법들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교과서적인 친구의 자세를 보며 나도 열심히 헤엄쳤는데, 이후 카메라로 기록한 영상을 보니 나의 영법은 흡사 물에 빠진 강아지의 그것과 같았다. 


에잇. 밥이나 먹으러 가자.


친구가 헬스장 인근에 정말 맛있는 딤섬집이 있다고 하여 점심 메뉴는 딤섬으로 정했다. 만두 귀신인 내가 마다할 리가 있나. 한산한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이곳만 사람이 바글바글했는데 샤오롱바오를 입에 문 순간 그 이유를 바로 깨닫게 되었다. 서울에서 샤오롱바오 고수가 운영하는 가게를 자주 갔는데, 그곳은 물론 홍콩에서 먹었던 샤오롱바오보다도 더 맛있었다. 세상에! 누군가 나에게 딤섬 맛집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샌프란시스코의 이 집을 추천할 것이다. 

더불어 직원들도 정말 친절했다. 그중 한 직원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보고는 한국인인지 묻더니, '혹시 연예인이냐?'라고 묻기까지 했다. 나는 껄껄껄 웃으며 아니라고 손사래치고는 배가 어느 정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만두를 추가했다. 전에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데 모 트로트 가수는 관객의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우리 애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스갯소리지만 애기 소리를 졸업한 지 오래인 팬들은 그 소리를 들으러 콘서트에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아마 딤섬 집 직원의 저 질문도 트로트 가수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하니 고도의 자본주의적 심리전에 당한 것 같아 다소 분하다. 


기분 좋다 못해 배까지 터질 지경인 식사를 마무리하고 나오니 그간 풀어진 긴장감을 바짝 조여야 할 것만 같은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차량 털이의 흔적

소문으로만 들었던 차량 털이를 실제로 목격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주가 2014년에 도입한 '발의안 47'(950달러 이하의 절도는 경범죄로 분류하는 법)로 인해, 샌프란시스코는 각종 절도 및 강도 사건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미국 입국 삼일차에 내 눈앞에 떡하니 벌어질 줄이야. 

딤섬 가게가 위험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우리나라로 치면 강남 한복판에서 차량 털이가 발생한 것이다. '헬 조선, 예스 아메리카'를 외치며 경계심이고 뭐고 바닥에 다 내려놓고 헬렐레 팔렐레 다니던 나는 뒤 창이 뻥 뚫려버린 차를 오랫동안 쳐다보며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 장난 아니구나. 연습 없이 바로 실전이구나. 괜히 든 것 없는 가방을 꽉 잡아 보는 순간이었다.


수영을 다녀와서는 친구도 나도 피곤해서인지 냅다 잠들어버렸다. 먼 나라까지 여행 가서 도대체 뭐 하고 있냐고요? 삶을 즐기고 있는데요. 하하하.

저녁에는 친구의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다국적 기업에 재직 중인 친구는 미국 발령을 받으며 자연스레 발령 동기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친구가 특히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멕시코, 말레이시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정말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에서 온 손님인 내가 궁금하다며 발령 동기들의 주간 정기 모임에 나를 초대했고, 나는 10여 년 전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은 '영어 듣기 평가용 청력'을 오랜만에 장착하고선 떨리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국가 번호조차 82인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친구와 나는 약속 장소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약속 시간 30분이 지나서야 사람들이 슬슬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교적 기술에는 시간도 포함된다던데 우리도 좀 늦게 올 걸 그랬다며 속으로 툴툴거리던 차에 모든 사람들이 드디어 모였다. 가장 늦게 온 국가 대표는 누구였냐고요? 나의 이야기로 인해 국가적 편견이 생길까봐 두렵지만 작은 힌트를 드리도록 하죠. 영화배우 '샤를리즈 테론'의 출생 국가의 대표님께서 무려 2시간 늦으신 관계로 꼴등을 가져가셨답니다. 딱히 뒤끝이 남아서 알려드리는 건 아니에요. 하하하. 하하하하하.


친구의 친구들, 이하 샌프란시스코 친구들은 국적도 나이도 모두 다양했다. 그리고 특히 부부 동반으로 모임에 온 친구들이 많았다. 여행 끝무렵까지 자주 만난 친구들은 멕시코 출신의 '오스카'와 '아수' 부부, 말레이시아 출신의 '크리스'와 '신시아' 부부였다. 부부 중 한 사람이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 중이었으며, 다른 사람은 배우자를 따라 머나먼 미국까지 함께 왔다고 했다. 와, 결혼이란 이런 걸까? 배우자에 대한 믿음 하나로 길쌈하던 베까지 버리고(고전시가 '서경별곡' 인용) 타국까지 좇아오다니.. 그들의 용기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신시아'의 남편인 '크리스'였다. 그는 내게 자기가 몇 살처럼 보이냐고 물었다. 친구로부터 샌프란시스코 친구들의 대부분이 20대라고 들은 나는 자신 있게 '27살'을 외쳤는데 주변의 모두가 빵 터지면서 'Seriously?(진심이야?)'하고 되묻더니 이내 '크리스'는 38살이라고 했다. 국제 나이로 38살이니 아마 우리 나이로는 이미 40대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연륜(?)이 쌓인 사람은 달랐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어 공통적인 대화 주제가 없는 나를 위해 '크리스'는 한국의 요리, 한국의 드라마, 한국의 영화에 대해 세심하게도 물어봐 주었다. 덕분에 대화 주제가 끊이지 않아 오랜만에 만취했다. 집에 어떻게 갔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 저녁이었다.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몇 시간을 영어로 떠들다가 친구와 둘이 남은 순간 갑자기 한국어를 쓰려니 놀랍게도 한국어가 정말 안 나오더라는 것.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였지만 순간적인 코드 스위칭이 원활히 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술이 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자료로 쓸 수 있는 경험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날의 나를 만취케 한 위험한 액체, 기네스.

어릴 적 읽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제우스'의 머리를 쪼개고 태어났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읽으면서도 정말이지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그로부터 약 20년 후 나는 '제우스'의 기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전날 즐거운 모임으로 인해 되지도 않는 객기를 부린 덕분에 다음날 아침에는 정말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으로 먹을 것이라고는 씨리얼과 팬케이크뿐인 나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핏줄은 속일 수 없는지 나의 위장은 당장 죽을 내놓으라며 울부짖고 있었다. 마침 친구가 밥을 지으려고 불려둔 쌀이 있다기에 그것을 냅다 물에 끓이고는 계란도 풀고 다시다도 조금 넣어서 엉터리 계란죽을 완성했다. 미국에서 먹은 음식 순위를 매길 때 여태껏 상위권에 속하는 것이 바로 이날의 계란죽이다. 


비주얼은 조금 그렇지만 최고의 한 끼였다.


비도 주룩주룩 왔던 12월 17일은 친구와 집에서 내내 뒹굴거리며 지냈다. 미리 챙겨간 닌텐도도 마음껏 하고, 유튜브도 같이 보며 깔깔깔 웃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서울에서의 하루와 비슷하게 흘러가 버린 시간이 문득 아까웠던 나는 급하게 영화를 보러 가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미개봉인 작품을 볼 생각이었기에 마음이 매우 설렜다. 친구의 상태가 조금 더 안 좋아(친구는 훨씬 독한 술을 먹었다.) 혼자 영화를 보러 가겠다고 했지만, 이내 친구도 나와 함께가 아닌 이상 언제 또 미국의 영화관에 가보겠냐며 흔쾌히 따라나서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관람 영화는 바로 '웡카'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영화 '웡카'는 미국 현지에서는 12월 15일 개봉, 한국에서는 무려 1월 31일 개봉 예정이었기에 남들보다 한 달 반이나 빨리 본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했다. 그리고 피의 티켓팅으로 인해 좋은 자리 예매는 꿈도 못 꾸는 한국의 IMAX 상영관과는 달리 당일 예매에도 불구하고 명당자리에 앉을 수 있어서 기뻤다. 딱 한 가지 유일한 단점은 한글 자막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영어 듣기 평가용 청력'을 장착한 나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못 알아듣는 부분이 있어도 그저 '티모시 샬라메' 영상 화보집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상영이 끝난 후의 영화관

이렇게 미국 여행 4일 차의 밤도 저물어 갔다.

이것 참. 도대체 제대로 된 여행은 언제 시작하냐고요?


영화 관람 후 7시간 뒤인 18일 새벽, 

우리는 드디어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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