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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떡 May 10. 2024

미국인처럼 살아 보기

2023년 12월 15일

친구가 에어매트를 마련해 준 덕분에 간밤에 등 결리지 않고 편하게 잤다. 비록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긴 했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돌아다니다 보면 보다 더 빠르게 시차 적응이 가능할 것 같았다.

얹혀사는 객식구로서 소소하게나마 할 일은 해야지 싶었다. 친구님께 문안 인사 올린 후 앞치마를 둘러매고, 전날 장 본 것들을 조합하여 출근 직전의 친구를 앉히고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아침 식사를 차려 주었다. 특히 사과는 부모님께 깎아드리는 것보다 더 열심히 깎았던 것 같다. 

출근하는 친구를 배웅하고는 시차를 이기지 못한 채 좀 더 자버렸다. 나는 평소 여행을 할 때 굉장히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편이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일단 일상이 너무 바빠 여행 계획을 짤 시간이 거의 없었고, 출국 11일 전 지독한 A형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계획 짜기를 완전히 포기했다. 고로 오늘의 계획은? '없음.'


뭘 하면서 하루를 보낼까 고민하다가 일단 패드를 챙겨 카페로 향했다. 미국에 왔으니 본토 카페인 블루보틀이나 한번 가보자 싶어 블루보틀에 자리를 잡았다. 본토라서 가격이 좀 더 싸고 이런 것은 전혀 없었다. 단지 고공행진하는 환율만이 나를 반길 뿐….

빈속에 커피는 좀 아닌 것 같아서 따뜻한 코코아를 한잔 주문했다. 창가석에 앉아 코코아를 홀짝이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 좀 하다가(어딜 그리 바삐 가십니까?) 이내 정신 차리고 영수증 정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영수증 정리란, 2022년도 겨울의 프랑스 여행부터 만든 나의 루틴 중 하나로 여행지에서 그날마다 결제한 영수증 내역을 모아서 노트에 촤라락 붙인 후 나만의 노트를 만드는 것이다. 주로 혼자 여행을 떠나는 편이라 하루의 일정마다 어딘가에 앉아서 공상하는 시간이 많은데 그 시간을 활용해 영수증을 노트에 붙이며 인상 깊었던 것들을 정리한다. 물론 먼 훗날 영수증의 잉크는 기화하여 없어질 수 있지만 그것은 또 그것대로 좋을 것 같아서 노트는 꾸준히 만들고 있다. 그리고 영수증 노트의 또 다른 장점! 여행지라는 이유로 들떠 천방지축으로 긁어버린 카드 내역들을 보며 하루를 반성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후 일정과 관련한 예산 수립에도 굉장히 도움이 되기도 하니 나로서는 안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블루보틀에서의 영수증 정리. 나이키에서 뭔가를 잔뜩 산 흔적이…


카페에 앉아 영수증을 노트에 붙이고 여행의 소감을 기록하는 것은 현지인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장면의 나를 놓고 메타인지를 발휘해 보자면, '나는 외지인이 아니다. 평화로운 현지인 백수의 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미국에마저 잘 녹아들어 버린 나 자신에게 감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너무나 많은 잠금장치를 단 채 누가 봐도 여행용인 작은 가방을 메고 한껏 긴장하며 카페에 등장했으니 샌프란시스코 로컬들이 독심술을 할 수 없다는 점에 깊이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카페에 1시간 30분 남짓 앉아있었을까. 슬슬 엉덩이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카페 안에 주구장창 앉아 있기 좋은 의자는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내 엉덩이보다 한참 작은 동그라미에 나의 체중을 맡길 뿐. 5.95달러어치의 휴식을 누린 후 가혹한 자본주의의 이치에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뭘 할까? 계획 없는 하루답게 구글 지도를 열어서 눈에 띄는 곳 아무 데나 가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곳은 카페 근처의 작은 문구점이었다. 평소 서울에서도 문구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이기에 미국의 문구점은 어떤 곳일지 호기심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당차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적당히 친절한 직원들이 나에게 적당히 아는 체를 했고, 적당한 물건들로 채워진 매대가 나를 반겼다. '뭐야 생각보다 볼 게 없네.'라고 생각하며 그냥 나가려던 그 순간! 내 눈을 사로잡은 것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책이었다.


문구점에서 도대체 책을 왜 팔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교보문고와 핫트랙스의 관계성을 생각하니 이내 이해가 되었다. 찬찬히 매대에 즐비하게 놓인 책들을 살펴보았다. 인상적이었던 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두꺼운 책이 아닌, 간식 수준의 얇은 책들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제목도 아주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틱낫한 스님의 'How to'시리즈와, 'Stuff Every man should know(모든 남자가 알아야 할 것들)'라는 책이었다. 'How to' 시리즈는 제목부터 정말 흥미롭더라. 특히 How to fight가…. 그리고 'Stuff Every man should know(모든 남자가 알아야 할 것들)'은 '어른이 된 후의 친구 사귀기', '완벽한 오믈렛 만들기' 등 일상에서 정말로 도움(!)이 될 법한 목차들이 재미있었다. 마음에 드는 책을 다 사 버릴까 고민하다가, 영수증 노트를 떠올리고는 한 권만 집어 계산한 후 밖으로 나왔다. 그 책은 바로…!



여행이 끝난 후 일상에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산 책.



치열한 삶 속에서의 휴식을 위해 샀다. 물론 짧은 영어 실력 탓에 영어사전 어플을 대기시킨 상태로 읽어야 하지만 말이다.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캐모마일 티도 한잔 하며 책을 읽으니 제2차 '나 혹시 전생에 미국인일지도?‘라는 생각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나 자신의 멋에 한껏 취한 채 책을 읽다가는 급 피곤해져서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다시 잠들었다. 친구에게 난 시차적응을 정말 잘한다며 큰소리친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자고 났을까, 친구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둔 알람 소리에 잠을 깼을 무렵은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긴 비행으로 지치기도 했고, 슬슬 물에 몸을 담가야 하는 쿨타임이 차고 있어서 친구와 함께 수영장에 가기로 했다. 수영장은 친구가 다니는 체육 센터에 있었다. 자본주의의 본토답게 대단히 비싸고 좋은 체육 센터인데 일일 게스트 입장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선진 문물 무료 체험을 내가 마다할 리가 없지! 친구가 찍어준 위치를 더듬더듬 보며 체육 센터 입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지도를 다시금 봐야만 했다.




왜냐하면 체육 센터라고 나온 곳이 마치 그리스 신전의 그것과 같은 위용을 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잘못 온 것 같아 어리둥절했는데 입구에서 친구가 나를 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친구야! 이게 정말 니가 다니는 체육 센터라고?? 흑흑 너 정말 성공했구나!!!!!!


초호화 체육 센터의 수영장


일일 입장에 무려 75달러. 원화로는 10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정말이지 이곳저곳 금이라도 발라 놓은 것일까 호기심에 가득 차서 체육 센터 탐방을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100평은 족히 넘을 듯한 체육 센터의 스케일에 압도되었다. 샤워 시설도 대단했다. 필요한 모든 것들이 백화점에서만 파는 고급 브랜드의 제품으로 구비되어 있었다. 수영인의 미덕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평소엔 마음껏 써 보지 못하는 고급 브랜드를 만끽하기 위해 그 언제보다도 구석구석 샤워했던 것 같다.

수영하면서 옆 레인의 잘생긴 미국인과도 대화했다. 무한 뺑뺑이에 서로 지쳐서 쉬던 중 눈이 딱! 마주친 것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일단 씨익 웃어 보였더니, 그도 씨익 웃었다. 내게 물이 너무 차갑지 않냐고 묻기에 얼어 죽을 것 같다고 답했다. 이 추위를 이겨내는 ‘단일한’ 방법은 더욱 많은 뺑뺑이를 도는 것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우리는 이내 다시 열심히 물장구를 쳤다.

운동이 끝난 후 친구와 저녁 메뉴에 대해 토론했다. 일단 집에 가서 밥을 만들어 먹을 계획이었는데 운동을 너무 열심히 해서일까? 그냥 사 먹자고 합의했다.(밥 만들고 기다릴 체력이 없었다.) 그리고 미국 입국 이틀차였던 나는 심각한 밥상 향수병에 걸려 한식을 부르짖었고, 구글 지도를 서치한 끝에 동네에서 꽤 유명하다는 한식집에 가게 되었다.


그날의 잊지 못할 식사

단백질을 보충해야 하니 양념 갈비를 시켰고, 민족의 정기인 빨간 국물도 필요했기에 김치찌개도 주문했다. 그리고 익숙한 나트륨의 향연에 감탄하며 게눈 감추듯 먹었다. 반찬도 너무나 백반집 그 자체여서 어찌나 행복했던지!!


여유로운 아침과 헬스장에서의 운동, 그리고 만족스러웠던 저녁식사까지. 미국 이틀차는 (직업이 없는) 로컬의 삶을 살아볼 수 있는 하루였다. 

워밍업을 제대로 했으니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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