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지 않았잖아. 그런데 지금은 왜 꾸준히 책을 읽어?” 왜 책을 읽냐는 질문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공부를 왜 해?’ 같은 질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대학 입시를 맞이해야 할 운명을 타고난 한국인에게,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국가와 사회가 부여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우리는, 책을 읽는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능동적으로 삶을 만들어가면서 우리는 저마다 개개인의 이유를 가지고 산다. 그렇다면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머니는 책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집에는 책이 참 많았다. 사회적으로 책이 좋은 인식이었기 때문에 ‘책이 많다.’는 것은 자부심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책을 많이 읽는 훌륭한 분이다.’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저녁이 오기를 바란 적이 많다. 저녁마다 어머니가 책을 읽어주셨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은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지만, 듣는 것은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다. 책을 읽어주는 엄마 목소리를 듣다가 잠드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때에는 책 내용을 까먹어서 같은 부분만 며칠 동안 읽어달라고 한 적도 있고, 어떤 때에는 아직 잠들지 못해서 더 읽어달라고 한 적도 있다. 몇 권의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책을 읽어주는 그 시간이 내겐 좋은 기억이 되었다. 어머니가 선생님인 수업을 했었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는 수업이었다. 승부욕이 강했다. 그래서 그 시절 책 읽기는 반강제였다. 다른 친구들보다 책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했고, 더 좋은 말을 하고 싶었고,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었다. 이 욕망은 책을 반강제로 읽게 만들었지만, 문자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책을 읽다 보니까, 책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책 읽기가 두렵지도 않았다.
책을 ‘읽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9살 때부터였다. 이 전까지는 학교에서 숙제를 주는 경우처럼 강제적인 이유가 없으면 책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19살 때부터는 내가 먼저 책을 들었다. 물론 그때는 지금에 비하면 수준이 낮은 책 읽기였다. 19살과 이전까지의 삶에는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성숙함이다. 18살 때까지의 인간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고등학교에 들어서자마자 뒷담화를 당했고, 이미지는 안 좋았다. 나도 미성숙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항상 힘들어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꾸준히 사고하면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누가 먼저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뒷담화를 한 친구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 고3이 되었을 때, 그동안의 일들을 다 털고 좋은 인간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책을 스스로 읽는 것이 그때부터이다.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로 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스스로 성장해 본 사람만이 책을 통해서 성장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성장과 비성장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걸까? 대표적인 차이는 주관적인 시각으로 객관적인 생각이 가능해진 것이다. 한 마디로 내 눈을 통해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차이가 책을 읽는 데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비판적인 시각이 없을 때는, 책을 읽는 것은 학교 수업 시간에 받아 적는 필기와 같았다. 무수히 쏟아지는 정보 지식에 불과했고, 단순히 받아 적는 것이 재미있을 리 없었다.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난 뒤, 책 읽기는 단순히 정보 지식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정보와 정보가 엮이고 엮여서 책이 말하는 내용 이상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현대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다양한 정보를 엮어서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고, 그 능력을 잘 발휘할 때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 과학에서 밝혀진 바로는 인간의 뇌와 컴퓨터의 가장 큰 차이는 그 능력에 있다고 말한다. 컴퓨터는 정보를 저장하는 데 능력이 뛰어나고, 인간의 뇌는 다양한 정보들을 엮어서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데 능력이 뛰어나다. 이는 현대 철학과 현대 과학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도,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도 그렇게 말했다. 정보와 정보를 엮어서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 느 것은,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 활동들을 자발적 활동 혹은 감성과 이성의 창의적 활동이라고 부른다. 창의적 활동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활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활동의 뿌리가 내게 있는 것을 의미한다. 뿌리가 나한테 있는 창의적 활동은 자신을 삶의 주체로 만든다. 세상을 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본 조건을 얻은 것이다.
책 한 권을 읽으면, 그 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읽었다. 그래서인지 최근 거의 모든 대화에 ‘에리히 프롬’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점점 책이 내 것이 되어가면 완전히 ‘에리히 프롬’의 생각이었던 것들은 어느 정도는 ‘내 것’이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넓어진 셈이다. 책은 내게 그런 의미이다. 이러한 활동은 책을 읽음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책은 그 자체로 재미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책을 왜 읽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세상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힘을 주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어떻게 창의적 활동을 이유로 책을 읽게 되었을까?” 이는 ‘에리히 프롬’의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창의적 활동을 원한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어린아이들로부터 창의적 활동의 재미를 빼앗는다고 한다. 어른들이 아이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녀들이 자신의 고민에 대해 말하면, 어른들은 그 고민들은 고민거리가 아니라고, 어른이 되면 더 어려운 일들도 많다고 말한다. 이러한 어른들의 태도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 거라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아이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 어른들의 태도가 탐구하고 싶고,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의 창의적 활동 욕구를 없애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리히 프롬’은 아이를 나와 동등한 대상을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어머니는 최소한 겉으로는 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혼낼 때는 내 반박에 논리적으로 재반박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은 나도 할 수 있었다. 다양한 문제들을 이야기를 통해 추론할 기회를 주었다. 어머니와 추론한 것들은, 지금 보면 굉장히 수준이 낮은 내용이지만, 추론했던 기회들이 창의적 활동의 재미를 알게 해주었다.
자발적으로 자유를 행하는 삶이 좋은 삶이고, 행복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에리히 프롬’도 자유를 강조한다. 인간은 자발적 활동, 창의적 활동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고,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꾸준히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책을 통해서 자발적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음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느끼고,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책은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이 된다. 책을 읽을 수 있는 무한동력을 얻은 셈이다. 지속적인 독서 생활은 동력이 중요하다. 도대체 왜 책을 읽는지 고민한다면, 지속적인 독서 생활이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