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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솜사탕 Apr 05. 2022

13화. 솜이 얼굴

만 28세, 뇌경색 판정받았습니다. │얼렁뚱땅 써보는 투병일기

 뇌경색 발병 후 딱 한 달이 되었다. 그 끔찍한 날이 불과 한 달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길게만 느껴지는 회복기가 한 달밖에 안 지났다니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일기에서도 썼지만 회사에 복귀해 첫 출근도 했고, 퇴원 후 첫 외래 진료도 다녀왔다.(11화,12화 참조)


 눈은 여전히 나쁘지만, 좋은 소식이 한 가지 있다면 이제 가까이 있는 사물이 잘 보인다는 것이다. 이 사소한 진전에 삶의 질이 대폭 높아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컴퓨터 화면을 보는 것도, 글씨를 읽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다. 출근 준비를 할 때, 거울을 가까이에서 볼 수도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우리 집 강아지 유솜사탕이 다가오길래 뽀뽀를 했다. 그런데 눈앞에 또렷하게 보이는 솜이 코에 놀라서 으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다시 밀어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는데 그 귀여운 콧잔등이 선명하게 보였다. 원래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잘 보이지 않았었는데, 근거리 사물이 보이게 된 것이다.(물론 먼 거리에 있는 사물은 흐릿함 그대로지만, 근거리 시야에 진전이 있는 걸 보니 옥순이의 동료 뇌세포들이 열일하고 있는 것 같다.)


 너무 신나서 카톡방마다 '[속보] 유솜사탕 얼굴, 가까이에서도 잘 보여...뽀뽀하다 놀란 견주 쾌재를 부르다'와 같은 소식을 보내고 기뻐했다. 거의 3주 만에 나타난 진전이라, 엄청나게 들떠있었던 것 같다. 졸려서 귀찮아하는 솜이를 붙잡고 요리조리 살피며 그 귀여운 얼굴을 살펴보았다. 콧잔등도 만져보고, 삐죽빼죽 솟은 털도 만져보고, (얼마 전 장염을 앓아서 싫다는 애 붙잡고 간신히 먹인) 노란 약의 흔적이 남은 입가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약이 물들어 노래진 입가. 강아지용 가루약은 왜 노란색이 많을까?

 애는 졸려서 발로 내 얼굴을 막 밀어대는데, 나는 '엄마 이제 솜이 코도 보이고~ 솜이 눈도 보이고~ 솜이 입에 다 묻힌 약도 보이고~'라는 말을 하며 쉴 새 없이 들이댔다. 신이 나서 노랠 부르듯 떠들어댔다.(사실 집에 혼자 있어도 솜이하고 자주 대화한다. 물론 일방적이지만...) 그렇게 분명히 즐겁게 웃고 있었는데, 한순간 울컥해서 들여다보던 그대로 솜이를 끌어안고 울고 말았다.(하도 울었단 얘길 많이 해서 창피해 죽겠다. 이제 그만 쓰려고 했는데, 이건 기뻐서 흘린 눈물이니 진짜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적도록 하겠다.)


 솜이는 자다 말고 얼굴에 내 눈물을 후두둑 맞는 봉변을 당했고, 앞발로 날 쳐도 모자랄 판에 고갤 들어 날 빤히 쳐다보더니 내 얼굴을 핥아주었다.(강아지는 참 신기한 존재다. 분명 인간과 언어가 다른데,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마음을 나누는 교감을 한다.) 웃다가 울다가 아주 엉덩이에 뭐라도 나지 않고선 못 배길 상황 속에서, 그대로 솜이를 붙들고 한참을 쳐다봤던 것 같다. 솜이의 얼굴이 요목조목 보이면 보일수록 자칫 잘못하면 이걸 영영 못 볼 수도 있었다는 게, 그리고 그간 못 봤다는 게 너무 눈물이 났다.


 잠시 눈 상태를 말해보자면, 환한 낮보다 밤에 더 안 보이는데 (이건 라섹의 영향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빛 번짐이 너무 심해 가로등과 간판이 즐비한 거리를 보는 게 좀 힘들다. 확실한 건 발병 전에는 없던 증상이라는 것이다. 한 번은 밤에 차를 타고 가다 밖을 봤더니 그 높은 가로등 불빛이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번져 보여서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가끔은 이 모든 게 어이가 없고 웃긴다.

네이버에 빛 번짐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

 이런 세상을 보고 있으면, 내 눈에 누가 포토샵 깔아놓은 거 아냐?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밤에 보는 빛 번짐은 렌즈 플레어 효과, 흐리게 보이는 오른 눈은 가우시안 블러 효과를 먹인 것 같다.(효과 넣으신 분, 제발 ctrl+z로 Undo 좀 눌러주시겠어요?)


 다 번지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밤에 운전하려면 아직 멀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멀쩡한 차를 사놓고 방치 중인 나는 하루빨리 운전이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본가에 갈 때도, 병원을 갈 때도, 회사를 갈 때도 택시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너무 불편했다. 원래도 운전 실력이 그닥이었으면서도 마치 눈만 잘 보이면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것 마냥 운전이 너무 하고 싶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렇게 보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눈이 잘 보이게 된 것보다는 그냥 이렇게 사는 걸 받아들였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인가 보다. 지난 외래 진료에서 자꾸 뭘 보려고 노력하면 쉽게 어지러워진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아침저녁으로 먹는 약에 어지럼증 약이 추가되었다. 그 약 덕분에 너무 오래 보는 게 아니라면 그리 어지럽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저것 보려고 노력하고, 걷기 운동도 많이 하는 중이다.


 주변에서 '넌 살 사람이었어'라는 얘길 종종 듣는다. 나의 뇌경색 발병 이야기를 들은 지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그날 회사가 아니라 친구네 집에서 쓰러진 것, 응급실 대신 선택한 내과가 문을 닫았던 것, 그 내과 옆 약국의 약사들이 바로 119를 부르라 한 것 등 모든 것이 운 좋게 흘러간 덕분에 시기를 놓치지 않고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1화 참조)


 회사 동료들이 만일 회사에서 복시 증상이 나타났었다면, 내가 그냥 한쪽 눈을 감고 퇴근 시간까지 일했을 거라고 입을 모으기도 했다.(이 얘길 듣고 나도 진짜 그랬을 거라고 박수치며 웃었다.) 이제는 이렇게 보는 것도 익숙해져서 옥순이를 죽인 범인에 대한 원망과 좌절감은 흘러가고 '이만하길 다행이다!' 라는 안도감만 자리에 남았다. 그날 만일 동네 내과가 문을 열어서 그곳에서 시간을 허비했다면, 만일 그 건물에 날 병원에 데려다줄 수 있는 친구가 없었다면, 뇌경색 위치가 눈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면 등등 아무리 생각해봐도 끔찍한 결과만 나오는 옵션이 수십 가지였다. 좋은 신체는 좋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니, 이제는 얌전히 회복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어쨌든, 오늘은 간만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기였다. 가까운 사물이 잘 보이게 된 점, 그리고 내 정신 상태가 많이 평온해졌다는 점.(이 짧은 얘길 길게도 썼네.) 한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한 뇌세포들이 부분 업그레이드를 해냈고, 덕분에 솜이 얼굴을 포함해 가까운 사물을 원 없이 보는 중이다.(이 정도면 아마 곧 책 읽기에 도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눈 운동신경에 문제가 있는 거다 보니, 가까운 걸 계속 보다가 멀리 보면 멀리 있는 게 잘 안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을 오래 보다가 가까이 있는 것을 보면 또 가까이 있는 게 잘 안 보이곤 한다. 근거리가 더 잘 보이게 된 만큼 원거리를 보는 것은 아직 어렵고, 왼쪽 눈썹부터 뒷목으로 이어지는 편두통이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 힘겹기도 하지만, 옥순이의 동료들이 조만간 또 좋은 소식을 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믿고 기다리는 중이다. 오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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