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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니맘 Feb 17. 2024

설렁탕과 막걸리 한 잔



빠를 생각하면 함께 따라오는 불편한 단어가 있다. 바로 '술'이다. 술이  연결되는 것을 동생은 지금도 싫어한다. 오랜만에 만난 아의 지인분들이  반갑다는 인사로 '예전에 아버님이 술을 좋아하셨지.'라는 말을 할 때가 제일 싫다고 다.


고등학교시절 '비바청춘'이라는 방송프로그램에 나가서 '고민'이라는 주제로 아빠의 술얘기를 했었다. 집안 얘기를 전국방송에서 떠든 내가 한심스럽고 부끄러웠는지 방송이 나가고  동생들 원망을 한 몸에 받았다. 작가언니 꼬임에 빠져서 줄줄 써 내려갔던 내 사연은 아빠를 전국에 고발하는 이 되 말았다. 하지만 아빠는 나에게 서운해하지 않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방송 제일 큰 피해자는 우리 아빠였는데 엉뚱한 가족들만 유감이었던 것이다. 혹시나 '방송을 보면 아빠 술을 끊지는 않을까?' 하는 바이 있었는데 그 바람은 며칠의 효과만 남겼다.


지나고 보니 요즘 기준으로 우리 동네 아빠들 알콜리즘에 빠져 있었다. 내 기억으로 알코올이 선천적으로 받지 않는 두 아저씨를 빼고는  논일과 밭일이 끝나는 저녁에 동네 마을회관(가게 역할도 함께 한 것으로 기억)에 모여막걸리를 마시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했다.

"회관에 가서 아빠 데려와라. 저녁 먹어야 하는데 또 술타령인가 보다."

할머니가 내린 아빠 수배 명령에  나와 동생은 아빠를 찾아 회관으로 뛰어갔다.

"아빠, 할머니가 빨리 와서 저녁 먹으래."

 문을 열면 동네 아저씨들이  둥근 탁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찌그러진 양은 술잔에 막걸리를 채워서 들이키고는 입을 '윽' 닦으면서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 딸들 왔어?  들어와서 과자 하나 골라."

아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관 안으로 냉큼 들어가서 과자를 먼저 골랐다. 어차피 외상 장부에  올릴 것이고 비싼 과자를 사면 엄마한테 혼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초코파이 1개와 껌을 골랐다.

 "머니한테  ~ 한 잔만 더 하고 간다고 해."

아빠의 딱 한잔 거짓말이 시작되었다.

"할머니가 과자만 들고 오면 우리도 혼난다고 아빠랑 같이 오라고 했어. 빨리 한 잔 마셔."

 아빠의 뇌물인 과자를 손에 넣고도 우리는  할머니가 내린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  회관을 나오지 않았다. 딱~ 한잔이 두 잔, 세잔으로 이어지고 막걸리 한 주전자를 마실 때쯤 동네 아이들이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하나 둘 회관으로 달려오면 그제야 아빠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의 양팔을 잡고 집으로 귀가했던 기억이 가끔 그립다.'는 내 얘기에 동생은 '나는 진짜 가기 싫었는데 언니는 기억을 좋게 덮어씌우는 기술이 있나 봐.'라고  삐죽거린다. 지금도 초코파이를 먹지 않는 친구가 있다. 이유는 술에 취한 친구의 아빠가 꼭 사주던 과자가 초코파이였다고 한다. 과자는 같은데 함께 따라온 그날의 마음이 달라서 우리는 기억하고 싶기도 하고 지우고 싶어 하기도 한다.


"언니는 아빠랑 찍은 사진도 있네. 나는 아빠랑 둘이 찍은 사진이 없어. 둘째 딸이라고 차별이  심하긴 했어. 이거 봐. 언니는 아기 때 독사진도 많아."

동생이 앨범을 보다가 한 얘기다.

"무슨 사진인데?"

앨범을 보고 있는 동생의 등뒤로 다가갔다.


웅변대회에 나가서 찍은 사진들 중에 아빠와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보였다.

"이 번에는 에서 하는 대회, 9시에 시작이라서 대전에 가서 하룻밤 자고 가야 하는데  누구랑 가? 선생님이 물어보래."

웅변대회를 며칠 앞두고 밥을 먹다가 말을 꺼냈다.

"아빠랑 가야지. 이모네서 자고 간다고 얘기해 놓을게."

엄마가 막에게 밥을 떠 먹이며 말했다.

"아빠, 갈 거?"

같이 갈 사람이 아빠 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재차 확인을 했다.

"가야지 뭐."

"아빠, 절대 술 마시면 안 돼. 약속해. 약속 안 지키면 대회 안 나갈 거야. 진짜야."

나는 가족 앞에서 아빠의 약속을 받아 내겠다는 의지로 아빠를 쳐다봤다.

"안 나가면 말고. 너만 손해지."

아빠는 내가 불안해하면서 쪼아대는 모습을 즐기듯이 말했다.

"안돼."

숟가락을 내려놓고 울상이 된 나는 정말 아빠랑 가기 싫었다. 아니 술이 들어간 아빠랑 가는 것이 싫었다.

"술 안 먹고 갈 거니까  밥이나 먹어. 괜히 그러는 거야."

할머니의 말에 아빠는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지금생각해 보니 나는 초등학교 웅변 대표 선수였다. 학급대표로 시작해서 학교 대표를 거쳐서 군대표가 되었다. 군 대표로 도대회에 나가는 일이 많았었다.  그때는 공산당을 때려잡자는 웅변대회가 각처 주관으로 많이 열렸었다. 중학교에서도 농촌생활 진흥이나 독서감상문발표 대회 등 비슷한 형식의 대회가 꽤 많이 열렸었고 나는 학교대표로 자주 대회에 나갔었다.


"내일 선생 대신, 대전에 사시는 교장선생님이 가실 거야. 아빠랑 간다고 했지? 떨지 말고 잘하고 와."

담임 선생님의 응원을 받고 집으로 돌아 이모집에서  하룻밤 묶을 짐을 쌌다. 아빠는 양복바지와 푸른빛이 도는 셔츠 위에 빨간 넥타이를 매고 베이지색 점퍼를 걸쳤다.

"양복저고리 보다 이게 낫겠지?"

점퍼로 바꿔 입으면서 아빠가 말씀하셨다.

"오늘 아빠 멋있는데?  나는 이모가 만들어 준 치마 입고 갈 거야."

양장점 하는 이모가 만들어 준 맞주름이 잡힌 짧은 남색 시폰 치마에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다. 아빠와 내가  소지한 옷 에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술 안 먹었네."

우리 집 누렁이처럼 아빠 몸에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리며 말했다.

"하~~~"

아빠는 나를 향해 입김을 불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술을 좀 작작해라."

할머니가 뒤에서 아빠에게 말씀하셨다. 술이 들어가지 않은 아빠는 조용하고 인자한 모습에 신문이나 붓글씨를 쓰는 선비 같은 분이셨다.


어린 우리는 아빠의 고단했던 시골살이의 시작과 끝을 몰랐다. 아빠에게 술이 어떤 의미였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논과 밭에서 노동을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왔을까? 물 대신 막걸리로 목을 축여가면서 기에 맞게 농사일을 하기 위해 본인이 소유한 힘, 그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힘'막걸리 한 잔'이었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친구 숙자와 순이 은정이네, 마을 전체 아빠들이 저녁이면 개는 아래로 떨구고  팔과 다리를 우로 흔들며, 마치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는 댄서처럼  귀가하는 모습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 나는 술을 못 먹는 영미 언니네 아저씨가 부러울 뿐이었다. 


아빠와 버스를 3번쯤 갈아타고 마지막에는 택시를 타고 이모네 양장점에 도착했다. 이모부와 만난 저녁에도 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아빠는 반주조차 하지 않으셨다. '휴~ 다행이다.' 나는 그날밤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대회장에 무사하게 도착해서 대회를 잘 치렀다. 나는 3위에 입상했다. 교장선생님과 잘 모르는 주변 분들도 잘했다고 많은 칭찬을 하셨다.  아빠는 크게 칭찬하거나 좋아하시는 내색이 없었다. 1등을 못해서 속상했던 내 맘과 같다고 생각했다. 시골 촌동네에서 성장지만 나의 간크기는 전국크기보다 컸던 거 같다. 지나고 보니 인정욕구가 컸던 나를 충족시키기에 아빠는 칭찬에 인색한 분이셨다. 자식이 한다고 자식 앞에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덜 떨어진 부모라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대회가 끝나고 아빠가 데리고 간 식당은 설렁탕 집이었다. 뚝배기에 담겨 나온 설렁탕은  뽀얀 국물에 초록색 대파가 소복하게 올려져 있었다. 숟가락을 넣어서 한 번 저어보니 고기가 덜컥 걸려 올라왔다.

"여기다 밥 말아서  깍두기랑 먹어봐."

내 그릇에 있는 대파를 조금 걷어서 아빠의 설렁탕에 넣고 소금  넣어서 숟가락으로 저어주면서 말다.

"와! 깍두기가 왜 이렇게 커?"

나는 내 주먹보다 조금 작은 깍두기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

"여기 식당은 깍두기 크고 맛있어. 고기랑 다 먹어. 엄마한테는 짜장면 먹었다고 해."

아빠가 설렁탕에 깍두기 국물을 부으면서 말씀하셨다.

"여기 소주도 한 병 주세요."

옆테이블에 앉은 아저씨들이 소주를 주문했다.

"아빠도 먹고 싶지?"

땀을 뚝뚝 흘리며 설렁탕을 먹는 아빠의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집에 가서 먹을 거야. 빨리 먹고 뒷산에 올라갔다가 버스 타러 가자."


아빠와 함께 올라간 산은 공원으로 조성된 보문산이었다. 우리는 무 기념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 사만 찍어주던 아빠에게 누군가 나와 같이 찍어 주겠다고 제안을 했는지, 찍어 달라고 부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진을 보니 'UN대전지구전승비'라고 쓰여 있다.

지금은 어떤 곳으로 변했나 검색해 봤더니 대전의 명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힐링 장소로 변해 있다.


집에 돌아온 아빠는 저녁밥상에서 막걸리를 시원하게 들이다. 딸을 위해서 고생한 남편에게  엄마는 잔소리 대신 술안주를 상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설렁탕을 먹은 얘기만 빼고 줄줄이 아빠와 보낸 1박 2일을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가족은 다 함께 여행이나 외식을 했던 기억도 없고 다 같이 찍은 가족사진도 없다. 그때 그 시절, 내가 아는 대분분의 가족이 그랬으니 괜찮다.


아빠와의 행복한 시간을 담은 사진과 맛있는 외식의 기억을 비밀처럼 간직한 것은 4남매 중에 나뿐이다. 라서 누릴 수 있었던 혜택이었을까? 그날이  내가 기억하는 아빠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땀을 흘리며 설렁탕을 드시던 아빠와

커다란 깍두기에 막걸리  한잔, 설렁탕 국물에 소주 한 잔을  함께 하는 모습을 가끔 상상한다.

술이 지겹고 술에 취한 아빠 모습이 싫었다고 하면서도 설렁탕을 먹을 때마다 그리운 것은 이제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까? 미안한 마음만 남아서일까. 


 '이해한다는 것'
생각보다 오랜 시간과 경험을 요구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이해한다고 말했었나. 진정으로 이해하기는 했었는지,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곱씹어 보고
또 반성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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