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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니맘 Mar 02. 2024

내가 살던 고향에는 할머니가  있었지.


"할머니~ 언제까지 할 거야? 집에 가자."

진달래 동산에서 놀다 지친 나는 할머니의 나물 보따리를 붙 칭얼거렸. 온 동네 산들이 분홍색으로 그려진 그림 속에 나와 할머니가 서 있었다. 고사리가 나오기 시작하는 봄부터 알밤과 상수리가 다 떨어지는 늦가을까지  그 풍경화 속에  우리는 머물다.


"이렇게 많은데 그만 가자."

진달래를 씹어 먹으면서 할머니에게 고사리 한 움큼을 전달했다.

"조금만 더 따고 가자. 아무 때나 따는 게 아녀. 다 시기가 있는겨. 지금 못 따면 1년을 지둘러야 혀."

 하얀색  행치마  반을  위로 려,  모서리를 양쪽 허리춤에 묶어서 만든 주머니 속에 고사리를 받아 넣으면서 할머니가 말했다. 나물로 채워진 행주치마는 막달이 가까운 덩치가 좋은 임산부의 배모양 같았다.


밑으로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나는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봄이 되고 산과 들에 나물이 나오기 시작면 나와 할머니도 바구니를 끼고 밖으로 나다. 그렇게 쑥도 알았고 냉이와 씀바귀가 먹거리라는 것도 배웠다.

"시방 나오는 애기 잎사귀는 웬만하면 먹어도 안 죽어." 

할머니는 이른 봄에 산이나 들에서 나오는 푸른 잎은 독이 없다는 얘기를 죽지 않는다고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 줬다.


할머니는 아침 일찍 다이알 비누로 세안을 하고 벽에 붙어있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으셨다. 비녀를 풀고 왼쪽어깨 위로 머리카락을 모아서 참빗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듯 빗었다. 머리숱은 수 1인분 정도도 되지 않았다. 머리를 정성껏 빗어서 앞가르마를 반듯하게  하나로 묶었다. 묶은 머리카락은 할머니의 허리까지 내려왔다. 기다란 꼬리 같은 머리카락을 감아서  비녀를 꽂았다.

"할머니, 나도 해줘."

나는 매일 그 장면을 보면서 할머니처럼  쪽을 져달라고  졸랐다.

"아이고, 우리 호리는 머리숱이 내꺼 열 배는 되겄네. 한 손으로는 히지를 않." 

이 많았던 내 머리로 쪽을 지으면 가처럼 고 크게 만들어졌다. 

"엄마랑 나도 할머니가 되면 할머니처럼 비녀 꽂고 이런 저고리 입고 다니는 거야?"

그때는 내가 할머니가 되면 우리 할머니 같은 모습으로 시부모님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외출을 하는 날에는 머리에 기름까지 바르는 단장을 하셨다. 옥색 치마에 하얀 버선을 신고 치마끈을 묶는 모습은 참 멋져 보였다. 마지막으로 하얀 손수건까지 챙기면 외출준비 끝이 다.

"할머니 오늘은 잔치가?"

할머니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물었다.

"오늘은 여기저기 볼일도 있어서 못 데리고 가니까 동생들 봐주고 있으믄 할미가 사탕 가져다줄."

할머니의 말에 나는 얼른 하얀 고무신을 대령했다. 외출용 고무신은 낡았지만 깨끗게 닦아서 보관했던 것이라 얼핏 새것 같 보였다.


할머니는 열다섯 살에 시집을 와서 몇 명을 낳으셨는지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삼 형제를 키워내셨다. 그중에 둘째 아들인 우리 아빠와 사셨다. 정확하게 말하면 할머니가 살고 계셨던 집에  결혼하고 서울에 살던 우리가 할머니집으로  돌아왔다는 표현이 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 돌아왔으니 처음부터 할머니  곁에  있었다.

 

동시대의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여인들처럼 비슷한 스토리에 따라 우리 할머니 살아오셨다. 나라가 없는 시대에 태어나일본을 피해서 결혼하셨고 막냇동생은 징용에 끌려가는 아픔을 겪으셨다. 가난한 집에 큰며느리로 시집와서 악착같이 살았지만 할아버지는 막내 삼촌이 아버지를 기억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집은 땅도 있고 밥은 먹는 집으로 동네에서 가난한 집이 아니었다.


 '호리야~ 밥 먹어'하고 외치면 온 동네 아이들이 밥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집으로 귀가할 정도의 목소리 크기로 대장.  목소리는 할머니를 닮았다.

동네에서 지내는 시  음식을 총괄하던 대장. 특히 제사에 중요한 시루떡은 할머니가 만드셨다. 커다란 시루에 찌는 떡은 쌀과 팥고물의 두께가 일정하고 깊이도 맞아야 떡이 설지 않고 잘 익기 때문에 전문가의  솜씨를 갖춘 할머니가 맡으신 것이다. 시루밥도 잘 붙이고 불을 잘 조절하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다. 시향끝나면 할머니에게는 쇠고기가 포함된 음식 보따리가 전달되었다. 쇠고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최고의 대접인 것이다. 계를 조직해서 목돈을 만는 계주도 하셨다. 

"당고모한테 가 이 핀지주고 계돈 꼭 보내라고 혀."

돈을 먼저 받아가고 소식 없는  당고모네 집에 나를 보내셨다. 할머니와 함께 갔던 기억을 살려서 버스를 타고 찾아간 당고모집은 마루가 높은 작은 집에 아이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할머니의 전언과 편지를 전하고 애들하고 신나게 놀다가 돌아왔다.

"너를 여기까지 보내고, 네 할머니도 어지간하다. 돈 보낼 테니까 기다리시라고 혀."

나를 보내신 의도를 잘 아는 고모도 나를 거기까지 보낸  할머니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같았다. 결국 당고모의 계돈은 할머니가 대납하신 걸로 들었다. 할머니가 무서워서 한 동안 친정에 몰래 다녀  갔다는 것도 나중에 할머니 들어서 알고 있다.

 할머니는 산수도 일본어도 잘하셨다. 바늘을 머릿속에 쓱쓱 문질러 가면서  한복과 이불 바느질을 하던 모습도 내 머릿속에는 인상 깊게 남아있다. 배가 아프거나 체기가 있으면 등을 퍽퍽 두드려 쓸어내리고 엄지손가락을 명주실로 총총 감아서 피를 모아 바늘로 따주셨다. 뒤뜰에 모초를 뜯어서 만든 즙을 한 사발을 먹으면 아픈 것도 다 나았다. 내가 보기에 할머니는 모르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는 그저 존경스러운 나의 대장다.


"할머니."

버스가 지나가고 한복을 입은 할머니가 보이면 나는 할머니를 향해  단숨에 달려갔다. 

"동생들하고 잘 논겨?"

할머니는 치마를 들고 속바지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 뭉치를 꺼내셨다.

"네가 젤루 좋아하는 거 골."

손수건을 펼쳐 보이면서 말했다.


고추가 나는 계절에는 고추를 서 장에 가셨다.  을에는 감을 따서 떫은맛을 없애는 작업을 했다. 나무에서 딴 감을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고 따끈한 물에 된장과 소금을 풀어서 항아리에 부었다. 항아리의 물이 식지 않도록 이불을 뒤집어 씌우고 하루 밤을 자고 나면 항아리 속 감은 땡감이 아니라 단감으로 변해 있었다. 깨끗하게 씻은 감  이고 장에 가서 팔 오셨다.

장에서 돌아오는 할머니 보따리 아침에 이고 간 고추나 감대신 운동화, 원피스, 과자등 우리를 위한 선물로 바뀌어 있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가 되면 술 익는 냄새가 가득했다. 내방 구석에 덮어 놓은 이불을 열고 술단지를 열면 그 향기는 온 동네를 덮을 지경이었다. 항아리 속 술밥의 상태를 보시고 용수 박을 시기를 체크했다.

"호리야 이리 와서 맛 좀 봐라."

술맛을 보는 일이 언제부터인지 내 담당이 되어 있었다.

"맛있어. 냄새도 좋아."

할머니가 맛보기로 떠준 술에 혓바닥을 대보고 말했다.

"냄시도 좋고  네가 맛있다고 하면 잘 된겨."

항아리 뚜껑을 덮으면서 할머니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그렇게 술맛을 알아갔고  술 만드는 방법도 어깨너머로 배웠다.


"호리야, 상수리 주수러가자."

할머니는 나무 떡메까지 챙겨서 상수리나무로 가득한 야산에 올라다. 할머니가 떡메로 나무를 '' 때리면 상수리가 우박처럼 떨어졌다.

"할머니, 저기 청설모가 도망간다."

떡메 치는 소리에 놀라서 나무 위로 도망가는 청설모를 보고 외쳤다. 우리는 청설모, 다람 경쟁하듯이  상수리를 주워 담았다. 우리가  람쥐의 먹이를 갈취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구황작물 중에 하나인 상수리를 산짐승들을 위해서 남겨둬야 한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그렇게 주워 모은 상수리는 마당 가득 널려지고 할머니의 손을 거치면 상수리 묵이 되고 우리 손에 들어오면 구술이나 공기놀이 장난감이 되었다.

탱글 탱글한 상수리묵은 날은 양념간장에 찍어 먹고  다날은 무침으로 나왔다. 래도 남으면 햇빛에 꼬들꼬들하게 말렸다. 그때는 지금처럼 녹말을 말릴 생각을 못 했다고 엄마가 말씀하신다.


나는 묵과 김치를 썰어 넣 멸치육수 부어서 만든 묵사발을 좋아했다.

"밥도 말아서 먹어봐."

묵사발에 밥을 말아묵밥을 만들어 주시던 할머니의  거칠고 검버섯 가득했던 손이 기억난다. 가을 산을 누비며 할머니와 내가 만든  최고의 요리였다.


우리 집 뒤뜰에는 커다란 도토리나무가 있다. 이사를 온 첫해는 나도 모르게 도토리를 주워서 모았다. 묵을 만들어  보고 다음 해부터는 다람쥐와 청설모에게 양보했다. 주방에서 일을 하다 보면 도토리나무를 뻔질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청설모와 가끔 눈이 마주친다.

"너나 다 먹어라. 나는 사 먹을 거."

 

'금이 아니면 1년을 기다리는겨. 억지로 되는 것이 아녀. 물이 호로록 끓어오르면 잽싸게 뚜껑을 열고 불을 빼야 . 아니면 너무 익어서 맛이 없어.'


모든 것에는 중요한 시기가 있고
그 타이밍을 놓쳤다면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는 지혜를 자연을 통해
 알려 준 할머니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하는 날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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