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앞니맘 Mar 09. 2024

컵라면과 미역국 사이


"어쩌면 좋아."

하던 일을  멈추고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선생님의 눈빛은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누군데? 애인 생겼어?"

선생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면서 화면을 바라봤다.

"우와! 애인이 생겼네."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렇죠~ 제 애인이 될 것 같죠?"

엄마와 이어진 탯줄을 자르고 있는 아기의 사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인 내가 바라보는 그 장면과 미혼인 선생님이 조카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분명하게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그 모습을 보고 연발하는 감탄사는 한 마음이 분명했다.  


"자기야, 일어나 봐."

원고 마감을 끝낸 남편은 술을 한 잔 하고 곯아떨어졌다.

"으흠~"

몸을 옆으로 틀면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옆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간단하게 챙겼다.

"빨리 일어나 봐. 큰일 났어."

다급하게 말을 했지만 일어날 반응이 보이지 않았다.

"자기야, 나 양수 터졌어. 병원에서 당장 오라는데."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처럼 자고 있는 남편의 귀에 대고 조용하게 상황을 알렸다.

"뭐? 아직 멀었잖아."

낮잠 시간이 끝났는데 일어나지 않고 자는 척하고 있다가 '친구들이 간식 다 먹는다.' 하면 벌떡 일어나는 유치원 아이처럼 남편은 바닥에서 튕겨지듯이 일어났다.

"나, 술 마셨는데? 운전은 어떡하지?"

밤에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생태였다.

"그렇다고 119를 부를 수는 없잖아. 당분간 밤에 술 먹 지 말라니까. 일단 씻어봐."

음주 측정기에 측정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음주운전이 분명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자기야 큰일 났다."

집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운전을 하던 남편이 말했다.

"뭔데?"

나는 순간 적으로 타이어에 펑크가 났나? 생각을 했다.

"기름이 없어."

'아이, 이런 무슨...'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가면서 양수의 흐름을 느꼈다.

"정말 없어? 그냥 119 불러?"

양수는 계속 나오고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그건 아닌데..... 병원 까지는 못 갈 것 같아."

남편도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식으로 대답을 흐렸다. 비 내리는 3월에 한 밤중, 도로 가운데에 서 있는 우리는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었다.

"일단 가봐. 다리 건너에 셀프주유소가 새로 생겼어. 셀프 주유소가 뭔지 궁금했는데 오늘 가보지 뭐."

나는 농담까지 하면서 남편을 안심시켰다.

"난 할 줄 모르는데? 자기가 할 수 있어?"

말인지 방귀인지 알 수 없는 남편의 말에 '내가 지금 양수는 흘러넘치고 배는 아파죽겠는데 내려서 기름 넣다가 애라도 나오면 어쩔 거야.'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생각에서 멈췄다. 그리고 힘을 빼고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겼다. 일단 셀프주유소가 빨리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달렸다.


"저기다. 설명서를 천천히 읽어 보면서 해봐."

우리는 무조건 주유소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세웠다. 카드와 현금을 챙겨서 나가는 남편을 향해'할 수 .'는 말이 주문어 나왔다. 주유기계 앞에 한 참을 서있는 동안 나는 점점 진통이 심해져 왔다.

"자기야, 못하겠는데?"

남편이 차문을 열고 백하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끙~ 나는 못 나가. 애가 나올 것 같아."

심해지는 진통에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저기요. 기름 넣으시려고요?"

반대쪽 건물에서 사람이 나오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내 생에 첫 번째 구세주였다.  그 뒤로 주유소를 지날 때마다 '비는 오고 날은 어둡고 술은 덜 깨고 애는 나오려고 하고 기름은 없고 남편은 기계치'였던 그날의 공포를 추억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아이가 나올 준비가 거의 다 끝난 상태로 병원에 도착했고 남편은 술이 완전하게 다 깬 상태로 병원 대기실에 앉을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만을 의지하면서 첫아이부터 막내까지 무사하게 출산을 마쳤다.


"산모님 식사 왔어요."

14시간의 진통 끝에 첫 아이를 낳았다. 퉁퉁 부은 얼굴에 실핏줄은 다 터진 상태로 누워 있는 나에게 첫 밥상이 도착했다.

"자기 밥은 신청 안 했어?"

내 밥만 도착한 것을 보고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가 먹다가 남으면 그거 먹을 테니까 빨리 먹어."

남편은 그 많은 밥과 국을 다 먹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알았어."

나도 그 생각에 동의를 하고 국을 한 숟가락 떠 넣어서 헐어버린 입을 적셨다. 그런데 미역국이 들어가자 몸에서 빠져나간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남편이 옆에서 내 밥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고 모두 싹싹 비웠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고 입맛이 없어서 밥이 맛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에 '아니요'라고 손을 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먹었던 미역국 중에 최고의 맛이었다.

"자기야, 맛있어? 많이 먹어야 아기 젖 주지. 나는 컵라면 사 올게."

남편은 컵라면을 사 와서 조금 남긴 반찬으로 허기를 채웠다.

"내가 먹은 컵라면 중에 오늘이 젤 맛있다."

부모가 된 첫날, 우리 부부는 최고의 컵라면과 미역국을 경험한 날이 되었다.


엄마는 4남매를 모두 집에서 출산했고 고기나 북어도 들어가지 않은 간장 미역국을 첫끼로 먹었다고 한다.

생일마다 끓여주던 엄마의 미역국은 들기름에 미역을 달달 볶다가 쌀뜨물을 넣고 끓여준 미역국이었다.

둘째를 낳 산후도우미가 끓여 준 미역국은 주로 홍합이나 해물을 넣미역국이었다.

그다음으로 내가 먹은 미역국은 남편이 생일에 끓여준 북어 미역국이었다. 엄마가 끓여주던 미역국에 북어가 추가된 미역국이라고 보면 좋겠다.

그중에 제일 맛있게 먹었던 미역국은 엄마나 남편이 끓여준 미역국이라고 하면 좋겠지만 솔직하게 첫 아이를 낳고 산부인과에서 먹은  소고기가 잔뜩 들어간 미역국이 최고였다.


싸움에서 승리한 장수가 들이켰던 승리의 술잔처럼 나도 출산이라는 첫 싸움에서 엄마라는 이름을 달고 돌아와서 미역국을 들이켰나 보다.

 

 미역국 맛의 비결은 오래 끓이고
많이 끓이는 것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각자의 사연과 정을 함께 끓여 온 미역국 같은 진국의 사람들이
내 옆에 있어서 나는 행복하고 감사하다.
 
이전 09화 내가 살던 고향에는 할머니가 있었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