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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앞니맘 Mar 06. 2024

아빠 나이쯤?


1주일 넘게 야근을 하고 신학기 준비를 겨우 맞췄다. 2월을 3일 남겨두고 기숙사로 돌아갈 아들의 짐을 챙겼다.  

"아, 나도 개학이네."

이불과 수건을 챙기는 일을 도와주던 딸이 이틀 쉬고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아쉬워했다.

"두 달이나 놀았는데 아쉬워?"

나는 딸의 표정을 살폈다.

"당연하지. 어디 놀러 가지도 못하고..."

딸이 방학하기 전에 나는 1주일의 겨울방학이 끝나고 출근을 했다. 딸은 1월부터 시작한 긴 방학을  혼자 보냈다. 물론 큰오빠는 동생이 좋아하는 콘서트장에 데리고 갔고 학원도 데려다주는 수고를 맡았다. 작은 오빠는 기숙사에서 돌아왔고 집에 있는 동안에 산책도 같이하고 스팸볶음밥도 만들어 주었다. 삼 남매가 늦게 까지 게임도 하면서 함께 놀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혼자서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차량운행 끝나고 데리러 올 테니까 조금 더 자고 있어. 문은 엄마가 잠그고 갈게."

자고 있는 딸에게 당부를 하고 출근길에 나섰다.  방학이었지만 오빠들이 모두 아침 일찍 나와야 하는 상황이 되면 '차라리 학교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엄마, 나 그냥 집에서 밥 먹고 있다가 학원 가면 안돼? 하나도 안 무섭고 혼자서 밥도 먹을 수 있어. 걱정 말고  이따가 학원만 데려다줘."

딸의 간곡한 말에 나는 허락을 했다. 1년이 지나는 사이에 딸은 건강한 아이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3월이 시작되었고 나도 아이들도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다. 평소보다 두 시간을 일찍 자고 한 시간은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고 출근 준비를 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반이 진짜 별로야. 문제 있는 남자애들이 다 우리 반이야. 여자애들은 너무 조용해서 공부만 하게 생겼어."

개학 첫날, 반 배정부터 짝을 바꾸는 방식, 알림장을 공책에 쓰라고 한 선생님에 대한 불평까지 저녁 식탁은 딸의 투정으로 차려졌다.

"너나 잘해."

우리 가족은 냉정했다.


"어제 보니까 선생님들도 다 바뀌셨더라고."

차가 학교에 가까워지자 딸이 말했다.

"올 해는 어쩔 수 없으니까 잘 지내봐. 잘 지내겠다고 생각을 하고 봐야 좋아하는 친구도 생기고 재미있는 일도 생기지."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엄마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의 말을 골랐다.

"담임 선생님 했으면 하는 선생님이 있었거든. 작년에는 6학년 선생님이었는데  어제 보니까 4학년 담임이 되셨더라고."

선생님에 대한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던 딸이 뜬금없이 선생님 이야기를 했다.

"네가 6학년 되면 다시 6학년 맡을 수도 있지 뭐. 남자야? 젊은 선생님이야?"

남자 아이돌을 한참 좋아하고 있어서 젊은 남자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아니, 아빠 나이 정도?"

딸은 그 말을 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우산을 흔들면서 학교로 향했다. 딸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울었다. 내 마음을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눈물이 쏟아졌다. 1년 전에 아빠를 떠나보내면서 흘린 눈물이 전부인 것처럼 딸은 씩씩하게 지냈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내가 내 마음을 다 보여 주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 딸도 그랬던 것일까?

딸이 기억하는 아빠의 나이는  2023년 3월이 마지막이 되겠지?  그 나이의 모습을 평생 아빠의 모습으로 기억하게 된 딸이 안쓰럽다.  어쩌면 오늘의 눈물은 그냥 엄마만 느끼는 감정 일수도 있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딸, 생일에 오빠랑 같이 놀러 갈까?"

작년 3월, 아빠의 발인 날이 딸의 생일이었다. 모든 것을 재판 뒤로 미루고 미루던 아빠는 이제 놀러 가자는 약속을 지킬 수가 없다. 올해 생일는 직장에 하루 휴가를 내고 놀러 갈 생각이다. 몰래 우는 엄마보다 함께 놀러 가는 엄마가 딸에게 더 필요할 수도 있다.


남편이 떠1년이 돌아온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고  7일에는 항소심 번째 재판이 열린다.

오늘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기억나는 질문이 두 가지가 있다.

"재판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나요?"

1년 동안 나에게 묻고 또 물었던 질문을 기자가 했다. 재판이 커다란 바윗돌이었던 것은 맞다. 다만 그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걷는 사람에게 내가 던진 돌은 없었는지, 나만 모르는 사건은 없는지.... 지인들은 앞만 보고 살라고 하지만 내 기억이 기능을 잃을 때까지 반복할 질문이다.

"1주기를 보내면서 가장 하고 싶은 얘기는 무엇인가요?".

재판에서 승소하지 못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잘 못된 것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끝이 난다면 아빠를 존경하고 믿었던 우리 아이들의 자존감은 한 없이 낮아질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이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 아이들의 시선이다. 그래서 꼭 승소해야 다.  


삼 남매 아빠야. 잘 지내고 있지?
나는 막내딸 생일에 놀러 갈 거야. 부럽지?
이제 자기가 물어봤던 산수유도 피고 진달래도 피겠지?
올해는 꽃색깔이 흑백이 아니라
칼라로 보일 수 있게 나를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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