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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SMO Dec 02. 2023

왜곡의 결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하인리히 뵐

1.

읽을만한 책의 기준은 독자만큼이나 다양하지만, 시대와 공간을 넘어 일률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하나 있다. 저술 의도가 명확하기에 무엇을 말하는 책인지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 소개하려는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서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언론에 의해 한 개인의 명예가 생매장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은 그 언론사 기자가 총으로 피살되는 '눈에 보이는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말이지만 진실이란 원래 그렇게 거룩하지도, 위대하지도 그리고 따뜻하지도 않은 경우가 많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오히려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추악한 진실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흉악한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다. 발전과 성장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저자는 노골적으로 한 여인에 의해 피살되는 기자의 모습을 먼저 보여준다. 당연히 독자들은 '왜' 그런 사건이 발생했는지 궁금증을 갖고 책을 읽어나간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언론사가 진실을 왜곡하고 대중을 선동하여, 한 개인의 사회적 생명을 어떻게 무너트리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정부라는 직업은 엘리트나 지식인보다 서민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축제 기간에 우연히 알게 된 범죄자를 도운 죄는 언론에 의해 범죄자를 도운 빨갱이, 부모까지 빨갱이, 욕정을 주체 못 한 이혼녀로 변모한다. 언론의 대중 선동은 이렇게 비열하고 추잡하다.


카타리나 블룸은 형사에게 심문당하는 내내 자신이 쓴 어휘와 문장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해 이 사건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가장 많이 보여준 인물은 오히려 심문당한 블룸이었다. 이에 대비해 모든 사건의 정황을 자신들이 정한 결론에 끼워서 맞추는 언론사의 행태는 가히 대단했다.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커다란 죄악이라도 되는 듯이 언론사의 '염원'을 담아내는 헤드라인은 인디언 기우제와 다를 바 없었다. 근대를 주술에서 벗어났던 과정, 즉 탈주술화라고 설명한 한 막스 베버의 주장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미디어 대변혁의 시기와 함께 진짜 뉴스가 보기 힘든 요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어로 차이퉁(Zeitung)은 원래 신문을 의미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어느 일간지(빌트)의 고유명으로 쓰인다. 차이퉁의 기사는 그야말로 선동과 날조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책을 읽는 '내'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폭력이란 왜 발생하는지 그리고 권력과 결탁한 언론의 조작은 어떻게 개인을 파멸로 이끄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기사가 많았다. '그' 기자는 단순히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 생각에 그렇게 기사를 썼다고 말한다.


독일에서 있었던 일은 작금의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난다. 편협한 언론사의 만행은 언제나 비슷하다는 점에서 더욱 화가 난다. 살아있는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기자의 소임이라며 떠드는 언론인 중에 정말 감시가 목적이었던 것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선택적 정의와 선택적 감시가 항상 그들의 목적이었다. 알 권리라는 변명도 언론의 부조리를 감추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일 뿐이다. 추악한 욕망을 가리기 위해 공공의 선을 도구로 활용하는 뻔뻔함에 처음에는 소름이 돋았지만, 나중에는 우울과 슬픔에 잠기기도 했다. 이제는 화가 난다. 언론의 폐단에 대해 '기레기'라는 소박한 비판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언론의 권력을 이용해 성적인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블룸을 찾아왔던 기자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런 모습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더 비극적이다. 이 소설은 1975년에 독일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또한 작품의 설정상 사건이 발생한 시기(1974년)도 비슷하다. 50여 년이라는 세월과 독일과 한국이라는 물리적 거리도 '형편없는 기자'의 만행은 서로 약속이라도 했는지 가볍게 초월한다. 근대를 넘어 현대에 이르렀지만, 작품 속에 등장한 언론은 아직도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 2023년인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필자만의 오해일까.


이미지 출처 : 교보문고


2.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 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 빌트지에서 유사한 사건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차이퉁》의 가십에 대해 말을 꺼냈습니다. 친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최소한 조금은 그 기사를 믿는 눈치였습니다.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난 그녀에게 설명해 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어요. “그러니까 넌 이자를 정말 사랑한다는 거네.”라고요.


▶︎ 거짓과 선동은 너무나 쉽게 자기 자리를 찾는다. 하지만 진실은 어렵고 복잡해서 누구나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에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제목뿐만 아니라,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도 있다는 것이다. 헤드라인의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신문들이 정말 금수 같은 그들의 ‘무지함'으로 무엇을 야기할 수 있는지 한 번쯤 연구해 보는 것은 범죄학의 과제일 것이다.


▶︎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때때로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매주 발표하는 베스트셀러 목록을 없앤 것이었다. 이 책을 언급해야 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아무리 막강한 절대 권력도 그들만큼 항상 권력을 마구 휘두르지는 않는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교황이 직접 소송을 걸고자 자신의 위신을 떨어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자신의 보좌관, 즉 추기경들을 앞세웠다. 교황의 미사 때에도 이따금 추기경들이 그를 보좌한다. 나는 고해를 하긴 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 한국은 더욱 유치했다. ‘블랙리스트’라는 살생부를 만들었다. 권력의 시녀들은 항상 유치함을 유지하는 것이 삶의 모토인지도 모르겠다.



살해라는 '눈에 보이는 명백한 폭력'을 초래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폭력’을 다루는 것이다.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이 소설의 부제는 이미 작품의 주제를 시사하고 있다.


▶︎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 눈에 보이는 폭력을 초래한다는 구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저자가 부제로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로 정한 이유가 어느 정도 이해된다.


3.

괜찮은 언론을 꿈꾸며


이런 분께 추천드려요!

언론 개혁에 관심이 있는 분

독일 문학을 읽고 싶은 분

짧지만 강렬한 작품을 찾고 있는 분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저자 : 하인리히 뵐
번역 : 김연수
출판 : 민음사(2008)

지식/정보 : ★★★☆☆
감동/의미 : ★★★★☆
재미/흥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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