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창밖의 나무는 푸르게 무성해졌다. 봄이 시작될 무렵,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가지는 앙상하기 그지없었는데, 언제부턴가 초록빛 잎사귀들이 가지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 이렇게 변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매일 그 창문을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순간을 포착하지 못했다. 마치 우리의 내면이 변하는 방식과 같았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고, 그저 어느 순간 문득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성장이란 갑작스러운 도약이 아니라, 매일의 미세한 변화가 쌓여 만들어내는 조용한 기적이다.
예전에는 하루라도 성과가 없으면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뭔가 달라져야 해'라는 조급함이 가슴을 짓눌렀고, 저녁이 되어 돌아보면 '오늘도 별것 없이 하루가 지났다'는 자책감이 뒤따랐다. SNS 속 다른 사람들의 화려한 성과를 보며 나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은 초조함에 시달렸다. 마치 정해진 속도로 달려야 하는 러닝머신 위에 올라선 것처럼, 나 자신의 리듬은 무시한 채 남들의 박자에 맞춰 살았다. 그렇게 달려온 길 위에서 문득 숨이 차오르고, 뒤돌아보았을 때는 공허함만 남아 있었다. 빠르게 지나간 시간들 속에서 정작 나의 마음은 어디쯤 뒤처져 있었을까.
천천히 걷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떠나고 난 후였다. 상실의 시간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속도가 아니라 깊이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가 빨리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천천히 내 안으로 스며들도록 여유를 두었다.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글 한 줄을 쓰기 위해 생각에 잠기는 순간, 책장을 넘기며 저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여백. 그러자 조금씩 내 안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속도가 아니라, 자신만의 리듬을 찾는 용기였다. 내면의 황무지에서 작고 연약한 감정들이 하나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느리게 살아간다는 건 때로는 외로운 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성과와 결과를 기준으로 서로를 평가한다. 회사에서는 '이번 분기 실적이 어떻냐'라고 묻고, 모임에서는 '요즘 뭐 하고 지내냐'며 가시적인 변화를 궁금해한다. 그 질문들 앞에서 '별다른 변화 없이 그냥 살고 있다'라고 답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정체된 사람처럼 보일까 봐, 무언가 이루어낸 것이 없어 보일까 봐 괜히 부풀려 말하거나 얼버무리곤 했다. 우리 사회는 빠른 성장을 선으로, 느린 변화를 게으름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느 조용한 저녁,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일기장이 내게 다른 진실을 보여주었다. 먼지가 앉은 표지를 닦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발견한 것은 예전의 내가 매일매일 겪었던 작은 고민과 작은 성취들이었다. '오늘 동료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새로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거창한 성공담이 아니라,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 소소한 순간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를 지금의 내가 되게 한 것은 화려한 성공담이나 남들의 박수가 아니라, 바로 그 작은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마치 강물이 바위를 깎아내듯,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조각해 왔던 것이다.
이제는 안다. 아무도 몰라도 괜찮다는 것을.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지 않는 성장이 진짜 성장이라는 것을. 나만의 속도로 걷는 길 위에서 나는 충분히 변화하고 있었다. 진정한 성장은 박수받기 위한 무대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연습실에서 일어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자라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인생의 진짜 보물이었다. 매일 밤 글을 쓰는 시간, 아침마다 마음을 다잡는 순간, 힘든 하루를 견뎌내는 작은 용기들. 그 모든 것이 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타인의 인정보다 소중한 것은 스스로를 향한 신뢰였다. 그리고 그 신뢰는 오직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만 자랄 수 있었다.
느리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면서 또 하나 깨달은 것은 기다림의 가치였다. 우리는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다. 무언가를 당장 얻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여기고, 그 기다림의 시간을 참지 못해 조급해한다. 인스턴트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다림은 마치 결함처럼 느껴진다. 빠른 배송, 즉석 음식, 실시간 소통에 익숙해진 마음은 자연스러운 성장의 리듬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농부는 안다. 씨앗을 심고 나서 매일 땅을 파헤쳐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모든 꽃이 피어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기다림은 공백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그 깨달음이 찾아온 것은 글을 쓰기 시작한 초기였다. 밤마다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썼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것 같았다. 조회수는 0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댓글창은 적막했다. 그 침묵 앞에서 나는 자주 좌절했다. '왜 아무도 내 글을 읽지 않을까?' '내가 쓰는 이야기가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침묵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내게 주는 위로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속 복잡한 감정들이 문장으로 정리되는 순간의 시원함, 흐릿했던 생각이 명료해지는 기쁨. 그것들은 타인의 반응과 무관하게 나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었다. 진정한 가치는 외부의 인정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에서 온다는 것을 천천히 깨달아갔다.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바쁘게 달려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내면의 풍경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들과 마주했다. 답은 금세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 질문들과 함께 있는 시간 자체가 소중했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나는 나 자신과 긴 대화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화려한 결과보다 소소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작은 기쁨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 좋은 문장을 만났을 때의 전율. 기다림의 시간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속도가 아니라 깊이였다.
계절이 다시 한 바퀴 돌았다. 어느새 창밖 나무의 잎들은 더 깊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 봄의 연둣빛에서 시작해 여름의 짙은 초록으로, 이제는 가을을 준비하는 깊은 녹색으로 변해있었다. 마치 내 마음이 그러하듯. 빠르게 피어난 꽃은 금세 시들지만, 천천히 자란 나무는 계절을 견디며 오래간다. 내 마음도 그렇게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급작스러운 변화는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분명히 달라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예전보다 덜 조급해했고, 남과 비교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믿는 마음이 자라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시간표를 갖고 있다. 그 시간표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용기다.
오늘도 나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여전히 화려한 성과는 없었지만, 글을 쓰는 이 순간이 충분히 가치 있다고 느꼈다. 창문 너머로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을 보며 생각했다. 느리게 익어가는 삶은, 사실은 천천히 피어나는 꽃과 같다고. 그 과정 자체가 충분히 아름답고 의미 있다고. 급하게 피워낸 성과보다,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깊이가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 문득 지난 몇 년간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밤들, 혼자서 걸어온 길들, 침묵 속에서 키워온 꿈들. 그 모든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나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나의 속도로 걸어간다. 남들보다 늦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천천히 자라나는 이 마음 하나만으로 충분히 빛나는 삶이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깊이를 향한 선택이다. 급하게 달려가다 놓치는 풍경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걷는 것. 결과보다 과정을, 속도보다 방향을, 성취보다 성장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느리게 살아가는 지혜였다. 느리게 익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오늘의 내가 작은 격려를 건넨다.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시간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피어나고 있다.
예전엔
빨리 나아가야 잘 사는 줄 알았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눈에 띄는 성과가 있어야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근데 요즘은
느리게 익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조용히 쌓이는 하루,
아무도 모르게 괜찮아지는 마음.
나는 요즘,
느리게 좋아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