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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말랑해지는 밤

by COSMO

낮의 가면, 조용한 무게

아침 7시 23분, 2호선 사당역. 지하철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한 칸에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숨소리마저 삼킨 채 서 있다. 누군가의 향수 냄새, 커피를 들고 탄 사람의 아메리카노 향, 젖은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그 모든 감각 속에서 나는 이어폰을 더 깊숙이 밀어 넣는다. 옆 사람의 어깨가 내 어깨를 스칠 때마다 몸을 움츠린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역 이름들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다. 우리는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임대리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팀장의 물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아, 네. 괜찮습니다. 어제 잠을 좀 못 자서요." 사실 어젯밤 어머니와의 전화 통화 후 한참을 울었다. '언제 집에 올 거니?' '밥은 제대로 챙겨 먹니?'라는 평범한 질문들이 왜 그렇게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하지만 회의실의 차가운 형광등 아래에서 그런 감정은 사치다. 노트북을 펴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열고, 숫자와 그래프 속으로 도망친다. 점심시간, 동료들과 나눈 대화는 대부분 날씨와 주말 계획에 대한 것들. 진짜 하고 싶은 말 - "나 요즘 너무 힘들어" - 는 목구멍 깊숙이 삼킨다.


저녁 6시, 퇴근 시간.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신입사원이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한다. 나도 똑같이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답한다. 그 짧은 인사말 속에 담긴 피로감을 서로 알아차리면서도,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건물을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길거리의 네온사인들이 번쩍이고,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걸어간다.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귀갓길에 오른다. 가방 속 진동하는 휴대폰을 무시한 채. 오늘도 우리는 '괜찮은 척'이라는 무거운 가면을 쓰고 하루를 견뎌냈다. 그 가면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그것을 집어들 것을 안다.


고요함이 건네는 속삭임

현관문을 닫는 순간, 세상의 소음이 차단된다. 구두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 넥타이를 푸는 일련의 의식. 그것은 마치 갑옷을 하나씩 벗어내는 것 같다. 불을 끄지 않은 거실에는 창문으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퍼져 있다. 소파에 몸을 묻고 천장을 바라본다. 틱, 톡, 틱, 톡. 벽시계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그 단조로운 리듬 속에서 하루 종일 억눌렀던 것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프다.


처음엔 그저 피곤함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다른 형태로 변했다. 가슴 한구석에서 시작된 묵직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아, 이것은 외로움이구나. 회의 시간에 무시당했던 내 의견이 떠오르고, 점심시간에 혼자 먹었던 김치찌개의 짠맛이 입안에 맴돈다. 휴대폰을 들어 SNS를 확인한다. 행복해 보이는 사진들, 성공을 자랑하는 글들. 화면을 끄고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온다. 밤은 정직하다. 낮이 숨겨둔 모든 감정을 가감 없이 돌려준다.


그때 창밖에서 빗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창문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였는데, 점점 굵어진다. 발코니 문을 열고 나가니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에 닿는다. 도시의 불빛들이 빗물에 젖어 흐릿하게 번진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마음이 편안해진다. 비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을 똑같이 적실뿐이다. 나도 비처럼 그냥 있어도 되는구나. 잘나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 그냥 이대로도 괜찮구나. 젖은 머리를 털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거울을 본다. 그 안에는 꾸미지 않은 날것의 얼굴이 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진짜 나의 모습. 못생겼지만, 어쩐지 정겹다.


다정한 말, 나에게로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먼지 쌓인 노트를 꺼냈다. 3년 전 충동적으로 산 몰스킨 노트. 첫 장에는 '오늘부터 일기 쓰기!'라는 다짐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 뒤로는 백지. 웃음이 나왔다. 그때도 지금처럼 뭔가 시작하고 싶었나 보다. 펜을 들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기 시작했다. "오늘 정말 힘들었다. 팀장이 내 기획안을 대놓고 무시했을 때, 화장실에 가서 10분 동안 숨을 고르며 참았다." 글씨는 삐뚤빼뚤했고, 문장은 어색했다. 하지만 펜이 종이 위를 지나가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퇴근 후 일기 쓰기는 어느새 하루의 마무리 의식이 되었다. 처음엔 그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변화가 생겼다. 화가 났던 일을 쓰다 보면 '그때 그 사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같은 생각이 들고, 속상했던 일을 적다 보면 '그래도 내가 끝까지 해냈잖아' 하는 작은 자부심이 생겼다. 글로 쓰는 순간, 감정은 객관화되고 상처는 의미를 찾아간다. 어느 날 일기 끝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완벽하지 않았지만, 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잖아." 그 문장을 쓰는 순간, 목구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스스로에게 인색했던 걸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친구를 만났다. "너 뭔가 달라진 것 같아. 표정이 편안해졌어."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일기장을 다시 펼쳐봤다. 처음 페이지의 날카롭고 거친 글씨체가 점점 둥글고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마치 내 마음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처럼. 가장 놀라운 건 마지막 문장들이었다. "괜찮아, 내일은 더 나아질 거야." "실수했지만 배웠으니 됐어." "너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야." 내가 나에게 건넨 이 다정한 말들이, 어느새 단단한 뿌리가 되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며 헤매던 내가, 이제는 스스로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 밤 일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오늘의 나야, 정말 고마워."


너만의 속도, 너만의 마음

지난주 일요일, 동네 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일기를 쓰고 있었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젊은 여성의 전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나 괜찮아. 그냥... 좀 쉬고 싶어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가, 이내 다시 내 일기장으로 눈을 돌렸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속도로 치유되고 있는 중이구나. 그녀의 눈물도, 내 일기도, 모두 같은 여정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작년 이맘때의 나를 떠올려봤다. 그때의 나는 모든 것을 빨리 해결하려고 안달이었다. 상처받으면 즉시 잊으려 했고, 실패하면 당장 만회하려 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급하게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서두를수록 더 엉켰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은, 감정에도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슬픔은 충분히 슬퍼할 시간이 필요하고, 분노는 차분히 식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진짜 치유가 시작된다. 마음의 계절은 달력을 따르지 않는다. 각자의 시간표대로 겨울을 지나 봄을 맞는다.


오늘도 나는 펜을 든다. 노트 위에 오늘의 이야기를 쓴다. 때로는 한 줄밖에 쓰지 못하는 날도 있고, 때로는 몇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날도 있다. 중요한 건 매일 나와 만나는 이 시간을 지키는 것이다. 언젠가 이 노트를 다시 펼쳐봤을 때, 천천히 말랑해져 가는 내 마음의 궤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만의 속도였음을, 나만의 방식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다.


창밖으로 밤이 깊어간다.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지고, 고요함이 내려앉는다. 이 시간이 좋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다정하게 안아주는 시간. 내일 아침이면 다시 가면을 쓰고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하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밤은 우리에게 말한다. "천천히 가도 돼. 네 마음이 말랑해질 때까지 기다려줄게." 그 약속을 믿으며,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밤을 살아간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를. 그것이 아주 작은 변화일지라도, 분명 의미 있는 한 걸음이 될 거라 믿으며. 별이 뜨는 소리처럼 고요하게.




밤이 되면 마음이 말랑해진다


낮에는 괜찮은 척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버티고,

해야 할 일들을 해내고,


어쩌면 조금은 웃기도 했다.

그런데 밤이 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말랑해진다.


불 꺼진 방, 고요한 공기,

창밖으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


그 속에서 오늘 하루를 곱씹다 보면,

숨겨두었던 감정들이 하나둘 고개를 든다.


"오늘 좀 힘들었어."

"괜히 서운했는데, 말 못 했어."

"나만 이렇게 뒤처지는 것 같아."


낮에는 모른 척 지나쳤던 마음들이

밤이 되면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알게 된다.

아, 오늘도 애썼구나.


괜찮아.

마음이 말랑해지는 밤은,

스스로를 더 잘 안아줄 수 있는 시간이니까.


그러니 오늘은 애써 괜찮은 척하지 말고,

그냥 잠시, 너의 마음을 받아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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